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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ㅣ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평점 :
전쟁이 터지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서민들입니다. 애초에 어느 나라라고 해도 서민의 삶은 불안정하고 가난합니다. 전쟁이 터지면 가장 기초적인 질서가 무너지고 경제 활동이 스톱됩니다. 가뜩이나 어렵게 생계를 이어오던 그들은 최악의 상황으로 몰립니다. 배우자나 부모가 없어 생계를 아슬아슬하게 혼자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의 삶이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해집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파리에서는 부역자들을 즉결처분한답시고 매춘 여성들을 잡아 조리돌림하거나 공개망신을 주었는데 아주 비겁한 짓입니다. 시스템, 체제가 약자, 여성들을 보호는 못할망정 무능으로 그들을 생존의 위기로 몰아넣고서는, 남의 힘에 기대어 해방된 주제에 뻔뻔스럽고 기세등등하게 동족 중 피해자에게 징벌을 가하는 판이었으니 말입니다.
p13를 보면 라 프띠뜨 보엠 책에서는 집시 아가씨라는 뜻이라고 역주에서 설명합니다. 작은 보헤미안인데 이게 문맥상 집시가 더 어울리겠으며(보헤미아인과 집시는 다르지만), 정관사 la와 petite라는 철자(발음)가 남자 아닌 여성임을 알려 줍니다. p14의 나르비크는 노르웨이의 철광석 수출항인데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아 점령당했던 노르웨이의 딱한 사정을 상징합니다. 쥘 씨가 아는 바와는 달리 나르비크의 사정은 당시에 좋지 못했습니다. p67에는 레방에르라는 지명이 나오며 노르웨이의 전황이 (나치 입장에서) 더 악화했음을 보여 주지만 이런 호조세는 계속되지 못합니다.
p92, 이건 존엄의 복수(plural)라는 것이며, 프랑스어로는 nous이겠습니다. p529 본문 중에 또 복수(複數)가 언급됩니다. 이 소설은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간을 배경으로 삼는데, 전쟁 중(혹은 전쟁 직전) 겪은 고난은 고난인 것이고 등장인물들은 "견딜 수 없는 걸 유쾌하게라도 견디려고" 갖은 해학을 다 발휘합니다. 여튼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루이즈는 희한한 상황에 엮여 졸지에 매춘부 신세로 떨어질 판입니다. 물론 우리 독자들이 의사선생 사건을 다 봐서 알지만 그녀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의사가 왜 그런 요구를 했는지는 p216에 기절초풍할 사연이 나옵니다(이미 p18, 밑에서 둘째 줄에 그런 암시가 있기는 했어요) .
그녀에게는 여태 많은 연인들이 있긴 했으나 직업적으로 성을 팔던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처음 애인은 에두아르 페리쿠르라는 상이군인(p65)인데 1차 대전 복무 중 포탄 파편에 맞아 얼굴을 마스크로 가려야 하는 상태입니다.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물 중 하나인 <포탄 파편>도 생각나더군요. 이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돈을 손에 좀 쥐면 여인을 떠납니다. 루이즈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입니다.
르 푸아트뱅 판사가 이제는 배우자(의사)를 잃은 티리옹 부인에게 루이즈를 고소하라(p100)고 재촉하는 이유는 그가 아마도 예심판사(저 뒤 p237에 과연 그렇다고 나오네요)라서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한국의 경우, 공갈죄라면 친고죄가 아니므로 검찰 혹은 수사당국이 얼마든지 직권으로 수사, 기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3공화국 하에서의 프랑스 형사소송 체계는 전혀 달라서 피해자(공갈의 경우 그 목적물을 배우자의 공동 재산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의 고소가 있어야, 초동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사건에 대해 기소가 진행될 수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지요.
쥘 씨와 의사 선생 티리옹(죽기 전)은 신문을 열심히 읽었는지 전문가도 아니면서 전황에 대해 열을 올려 가며 토론합니다. "마지노선 쪽으로 오든지(이는 독일군의 자살행위), 벨기에 평지를 돌파하든지(1차 대전처럼), 아니면 벨기에 아르덴 숲을 뚫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어?" 이 두 중늙은이뿐 아니라 가믈랭 장군도 실제로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저 제3의 방안을 채택, 실행합니다. 탱크의 성능이 그처럼(빽빽한 숲을 밀고 들어올 만큼) 개량되었는지는 이 구닥다리들이 몰랐던 거죠. 빗소리를 두고 "아마 프랑스군이 독일 놈들을 때리는 소리(p145)"라며 현실 도피를 시도하는 중위의 말이 당시 프랑스 군대, 아니 국가 전체의 심각성을 잘 말해 줍니다.
원래 2차 대전의 발발은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을 기준점으로 잡으며, 이 소설에도 잘 나오지만 이미 선전 포고가 이뤄진 상태에서 다만 프랑스-독일 사이에 전투만 행해지지 않습니다. 날듯 날듯 하다가 결국 전쟁이 안 나는 상황이 무려 10개월 가까이 이어집니다. 이 소설에서는 이를 두고 "지레 진이 빠진다(p42)"고 표현합니다. 이걸 당시 저널리즘에서, 또 우리가 현재 읽는 역사책들에서는 phony war, 즉 가짜 전쟁으로 이름 붙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독일 놈들이 벨기에를 침공했어요!(p112)"가 된 것입니다.
p147에서 데지레 미고 변호사는 고위 당국자들의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를 냉소 혹은 비판합니다. 아직 전황이 불확실한 데도 "전쟁이 벌써 끝났음"을 단언하는 장군에게, 이는 마치 "거사를 일찍 끝낸 것과 같다"고 하는데 아마도 성적인 뉘앙스이겠습니다. 그러니 화류계 여성이 큰 소리로 웃은 거겠지요. p152 "그쪽에 기근이 너무 심해서"라고 하는데 이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비단 식량뿐 아니라 독일은 자원, 군수품, 생필품 등 모든 면에서 이미 심각한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일본도 미국의 금수 조치 때문에 한계 상황까지 내몰리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정신 나간 진주만 폭격을 감행했었죠. p198에 보면 독일 국민들이 나치에 대한 염증을 가져 히틀러가 조급해졌다고도 하는데 아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닙니다.
p281에서 데지레는 갈까마귀들이 집단으로 비둘기를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요즘 한국에서야 비둘기가 도시의 흉물이 되었지만 원래는 평화의 상징이었고, 흉포하며 습성이 더럽고 떼로 몰려다니는 갈까마귀가 나치의 의인화임은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습니다. ㅎㅎ 소설 속에서 계속 드러나듯 데지레는 가짜 변호사인데 p88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실력이 진짜보다 낫습니다. 그의 가짜 놀음은 이것뿐 아니라 p122에서 가짜 튀르키예어, p153에서 가짜 크메르어(=캄보디아어) 구사까지 화려합니다. p466에서는 가짜 신부가 되어 라틴어까지 읊어댑니다.
p129에 보면 또 데지레가 검열이랍시고 엉터리 같은 짓을 하는데 역시 배꼽잡을 만한 헛짓입니다. 이 한국어판에서 역자 임호경 선생과 열린책들 출판사는 편집상 재미있는 시도를 하는데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세계 문자 중 드물게도 우리 한글만 모아쓰기를 하는데 이런 묘미가 있습니다. p297 역주에 보면 gendarmerie를 헌병대로 옮기셨고, 성귀수 씨 같은 분은 이를 시범적으로 "군경"이라 전에 옮긴 적 있습니다.
p246에서 데지레는 자신의 맡은 바 반 나치 프로파간다 방송을 열심히 해 댑니다. 히틀러가 고환이 하나다, 심지어 여자라는 소문은 꾸준히 돌아다녔었습니다. 이 루머의 원조는 사실 (같은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었는데 그는 실제로 전투 중에 한 개의 고환을 잃어 후사를 못 남긴다는 소문이 파다했죠. 그러나 남경 정부의 장개석(장제스) 총통도 성불구자라고들 했듯 이런 루머는 사실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p111에 전직 수학 선생인 가브리엘이 앙브르사크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이는 장면 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p134에 약간 부었을 뿐 괜찮다고는 나옵니다). 그는 이미 p70에서도 죽을 고생을 했었는데 말입니다. p530에서는 드디어 다리까지 마비되는...
이 소설은 하나의 큰 비극이지만 수많은 희극으로 수놓아집니다. p206 같은 데서 보듯 프랑스어 말장난도 재미있게 이어집니다. 채플린의 말,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가믈랭 장군(p14), 페탱 원수(p598), 달라디에(p298), 레옹 블룸(p148) 등 지도자급 인사들이 더 현명하게 시국을 내다봤더라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일부 독재자가 탐욕을 부리면 어제까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던 시민들이 갑자기 그 삶이 지옥으로 떨어지곤 하죠. 우리 슬픔의 거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곳곳에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