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에어포트
무라야마 사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열림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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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화려한 터미널은 어른들의 세계였다.(p177)" 공항이든 기차역이든 터미널은 바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고, 많은 수의 역동적인 승객들이 드나든다는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정이나 관심을 잘 받지 못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터미널에 머무는 특이한 사람을 유의깊게 본다거나 시설 곳곳의 장식,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윽한 눈길로 주시한다든가, 연상되는 어떤 추억을 떠올린다든가 하는 일은 드물 것 같습니다. 그곳은 누구에게라도 어느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지점, 주소 이상이 되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공항은 마법의 공항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과거의 절친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5년 전에 이곳을 거쳐간 지인들이 남긴 흔적을 마주하기도 하고, 즐겨 읽던 만화의 작가를 영광스럽게 접견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자주 거론하던 어떤 직업 마술사를 흘낏 보기도 하는데, 시설 자체가 워낙 큰 곳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하네다 공항 같으면 사실 가능도 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 모든 신비로운 우연을 합리화라도 하듯 마녀 같은 마술사가 현장을 들렀기에 더욱 신비한 느낌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연은 사실 숨은 필연들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료지는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거친 행운아였고 뚜렷한 재능을 지닌 기대주 예술가였습니다. 그러나 작품들이 크게 시운에 맞지는 못했고, 재능이 꽃을 피울 적기를 살짝 놓치고 의욕도 잃어가며 결국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가려고 지금 이 공항을 찾았습니다. 나가사키로 가는 국내선 항로도 하네다 공항(물론 이 소설에 하네다라고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습니다만)에서 운영되니 말입니다. 게다가 료지 씨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 건 시오리와의 실연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보다는 살짝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해 왔던 절친 아키라가 원인이 되었으니... 

사실 저는 소위 "잘못된 만남" 류의 비극, 즉 절친과 여친을 동시에 잃은 데서 온 배신감 때문에 료지 씨가 좌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료지 씨는 차라리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한 것입니다. 더 먼저, 더 오래 알아 온 시유리에 대해, 그녀의 정서적 갈증을 절친 아키라가 더 잘 알고 더 잘 채워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키라만큼 살갑지 못했던 자신이 못나 보였던 거죠. 이뿐이 아닙니다. 둘은 료지 씨를 떠나면서 료지가 상처를 그나마 최소한으로 받게 배려하는데, 이것마저도 그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게 된 거죠. 왜 나는 쿨하게 둘을 축복하며 떠나 보내지 못했던 걸까? 그들은 훨씬 더 행복해질 수도 있었던 걸, 나 때문에 찜찜해하고 죄의식을 느낀 만큼 덜 행복해진 것 아니었을까. 료지 씨는 공항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데 한 사람은 늙은 화가였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팬이었습니다. 노인에게서 그는 놀라운 사연을 듣게 되는데... 

한편 료지 씨의 팬을 칭한 젊은 서점 여직원은 유메코라는 이름입니다. 어려서부터 잘나고 예쁜 언니 때문에 약간은 위축되어 살았던 그녀는 어려서 할머니에게 "책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은 공항 서점(이제는 퇴락한) 직원이며, 언니는 (독자의 예상과 달리 플라이트 어텐던트가 아니라) 조종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예쁘고 키 큰 여성만 보면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기는 유메코는 공항에서 나이 든 여성 두 사람을 우연히 보는데 한 사람은 배우, 한 사람은 작가였고 두 사람은 친구처럼 보였습니다.  

배우 마유리와 작가 메구미는 어려서부터 친구였습니다. 물론 미모, 인기, 집안 등 모든 면에서 마유리가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유리는 자신의 큰 키, 멋진 체형 모두에 대해 부담을 느꼈고 자그마한 메구미가 더 여성스럽다고 여겨 왔습니다. 어느날 메구미는 갈색 곱슬머리, 눈동자를 지닌 왕자님 같은 미소년(p214)에게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려고 듭니다. 그런데 한 발 앞서 마유리가 나타나 그 기회를 뺏고 마는데... 이 일로 메구미는 마유리에게 원망을 품고 두 사람의 주변에서도 마유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만에 공항에서 그녀를 만난 메구미는 전혀 뜻밖의 이유가 그 사건에 깔렸었음을 마유리에게 듣고 비로소 알게 됩니다ㅠ 

소설의 마지막은 페리시아 사치코, 국제 셀럽이 장식합니다. 나이는 훨씬 많지만 마유리처럼 부유한 집안 출신이고(전쟁기에 다소 굴곡이 있었으나) 전생애를 화려하게 산 사치코. 이런 분들이 종종 젊은 시절에 겪곤 하는 문제가, 너무 많은 남자를 거친다는 점입니다. 그녀를 알아 본 호텔 프런트 직원을 대한 후 사치코 여사는 자신이 그 아빠도 누군지 모른 채 가졌던 아이를 떠올립니다. 저는 처음에 이분이 수수께끼의 노인 화가 그 부인인 줄 알았으나 ㅎㅎ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쇼와 시대에 심은 꽃이 레이와 시대에도 피어 있을까(p145). 일기일회(p101) 세상에는 단 한 번의 기회로 스쳐지나가듯 만나며 알고보니 그(그녀)야말로 진짜 인연이었을 수 있습니다. 짧은 생에 있어 만남과 소통이란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그 연을, 다른 데도 아니고 그 사람 붐비는 공항에서 만나다니... 인생은 이래서 평범한 게 하나도 없고 모든 순간이 기적이요 마법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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