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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 ㅣ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4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 옮김 / 한경arte / 2023년 5월
평점 :
1917년 로마노프 왕가는 케렌스키가 주도한 2월 혁명에 의해 무너졌고 같은해 레닌이 주도한 10월 혁명(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최종적으로 공산주의로 이행했습니다. 당시 서유럽 사회는 인류 최초로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다는 충격보다, 그처럼 오랜 역사를 지녔고 백성들에 대해 확고한 지배력을 유지했던 황실이 붕괴하고 구성원등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데에 더 놀랐습니다. 물론 그때로부터 12년 전 피의 일요일 사건부터 해서 차르의 권위에 심각한 도전이 가해지는 일련의 사태가 있긴 했지만.
여튼 로마노프 왕조는 그 나름 오랜 역사를 갖고 독특한 궁정 문화를 발전시켜 온 황실이기에 그에 걸맞은 명화의 유산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 책은 오로지 러시아 황실만이 지켜온 독특한 기풍을 잘 반영하는 명화들과 그에 얽힌 공식 비공식의 재미난 이야기를 잔뜩 담았네요.
중세 유럽에는 플라젤런트라고 해서 자신의 신체를 채찍으로 때려가며 대중 앞에서 고행을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기원을 놓고 보면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악의악식을 일상으로 삼던 예언자들에게서 성경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 비슷한 게 러시아에도 있었나 봅니다(p41에 보면, 유로디비가 갑자기 늘어난 게 가혹한 농민 속박, 수탈에서 비롯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 책 p31을 보면 모로조바 공작 부인을 동정하는 유로디비(юродивый)가 그려졌는데 바실리 수리코프의 작품입니다. 바실리 수리코프는 19세기 사람이므로, 책에 나온 대로 모로조바 부인 체포 사건으로부터 2세기 후의 작품이 맞습니다. 마치 걸인이 화폭 안에서 뛰쳐나올 만큼 생생하게 그 눈빛과 손짓을 표현했습니다.
책에는 러시아판 종교개혁도 설명됩니다. 17세기 모스크바 대주교 니콘은 교회의 체질과 구조를 바꾸고자 했는데 그가 한 말 중에는 "교회는 태양이지만 차르는 그 빛을 반사하는 달에 불과하다(p35)."도 있습니다. 이 말은 서유럽에서는 교황권이 최전성기에 달했던 13세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처음 한 것인데 러시아에서는 3백년이나 지나서 유입된 것입니다. 그러나 니콘은 차츰 교회 독자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고 결국 이를 방치할 수 없었던 차르에 의해 숙청됩니다. 모로조바 공작 부인은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여 종래의 농민유착 신앙을 보호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이 책에는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작 안에 묘사된 공작 부인, 어느 이름모를 유로디비, 그리고 다른 화가의 솜씨인 알렉세이 차르, 니콘 대주교의 모습이컬러로 실렸습니다.
카자크 족은 전투 종족으로 유명한데 20세기 로마노프 황실이 망한 후에도 백군의 선봉에 서서 공산 정부와 싸운 사실로 유명합니다. 이미 이반 뇌제의 시대부터 카자크에 대한 집요한 회유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순응하고 동화된 이들도 있으나 끝까지 카자크의 전통을 고수하려다 노예로 팔려가고 모스크바로 유입되어 도시빈민층을 형성한 이들도 있습니다. 결국 스텐카 라진이 주도하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자유를 찾아 분연히 일어선 러시아 역사에 드물게 보는 위대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이 책 역주에는 예전 한국 가수 유연실이라는 분이 부른 가요 제목도 함께 언급이 되네요.
러시아 제국의 토대를 놓은 표트르 대제는 그 아들 알렉세이와 반목한 사실로도 유명합니다. "밤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과 얼음보다 더 차가운 눈을 한 표트르(p67)"는 기어이 아들을 죽입니다. p64에는 부황에게 끌려와 난처한 표정으로 심문받는 알렉세이 황태자가 그려진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게(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е)의 위엄 넘치는 그림이 나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결국 즉위했다면 알렉세이 2세가 되었을 텐데 이후로 이 불길한 이름을 한 계승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에서 최고 권력자가 어느날 갑자기 실각하는 패턴은 이미 오랫동안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p93)." 책에서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1세의 아들 표트르 2세와의 혼사를 통해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던 멘시코프, 돌고루코프 등 세력가의 비참한 몰락 사례가 서술됩니다. 앞에 나왔던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을 통해 저 우랄 산맥 너머 베레조보(Берёзово)에 일가족과 함께 유배된 멘시코프의 비참한 모습이 나옵니다. 마치 건륭제 붕어 후에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죽은 화신의 예와 비슷합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1세의 외손자며느리인데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여계로도 황통이 계승된 예가 아주 많습니다. 앞 p88에도 나오지만 엘리자베타 역시 서유럽에서 그리 대접 받는 왕실 출신과 혼사가 이뤄지기 힘들었던 굴욕을 겪었는데 에카테리나 본인은 러시아인도 아니고 지체도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죠. 한국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로마노프 왕실의 중시조로 받들어질 만큼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책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 때 이뤄진 황실의 부가 모두 농노 착취로 이뤄졌음을 지적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데 물론 사실이지만 다른 황제 때에는 착취는 착취대로 하면서 국세가 기울었지만 이분은 그걸 토대로 여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게 중요하죠. p128에는 네바 강에서 내다본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전경이 멋있게 뽑혀 나옵니다. p133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왜 계몽주의를 극구 회피했는지 저자가 분석한 이유가 나오는데 하나는 왕권이 약했던 폴란드의 예, 다른 하나는 시민 계급을 키워 주다 혁명까지 일어나 왕정 자체가 전복된 프랑스의 예를 보고 나서라고 합니다. p135에 일본인 표류자 다이코쿠야 고다유의 이야기가 나오네요(예카테리나 2세와 일본과의 한 접점).
나폴레옹 1세가 알렉산드르 1세보다 8세 연상이었는데 국력 면에서 상대가 안 되었던 러시아로서는 일단 실력자의 꼴사나운 유세를 받아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p152에는 자존을 굽히고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었던 알렉산드르 1세의 고역이 그의 서한을 통해 비춰집니다. 책에는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을 통해 아름답고 우아한 프랑스어 발음을 구사했던 알렉산드르 차르와, 코르시카 사투리가 너무 심해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폴레옹"의 매너를 대비하는 서술이 있습니다. p153에는 니콜라 고스의 그림이 나오는데 나폴레옹은 원래 단신인데다 이제는 머리가 벗어지는 뭔가 불안한 인상의 중년이지만 알렉산드르 차르는 날씬하고 기품 넘치는 귀족적 풍모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놀라운 건, 혈통도 변변찮은 나폴레옹도 이상한 에고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던 때, 마치 길거리에서 열심히 생계를 위해 뛰는 장사치처럼 몸을 낮추고 철저히 실리만을 추구했던 그 처세입니다. 그림 등에 나온 그 외모까지를 보면 더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이 시리즈는 적절한 도판 소개에 곁들여진 재미있는 왕실 이야기 때문에 더욱 독자들을 끄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 니콜라이 2세 이야기에서는 일본 화가의 그림도 소개되고, 러일전쟁이나 앞서 황태자 시절국빈방문 등으로 일본과 엮이는 지점이 특히 많은 차르의 파란만장 일생이 인상적으로 읽혔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