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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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스스로의 생존도 꾀하면서 자연에 거역도 하지 않는 대표적인 활동이 농사, 농업이겠습니다. 땅을 고르고 작물을 돌보는 움직임은 분명 인위적이지만, 자연에 딱히 큰 해를 끼치진 않습니다. 물론 사람이 한 지역에서 너무 오래 농사를 지으면 지력이 고갈되고, 지나친 관개를 하면 인접 지역이 사막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일부 지나친 기계화, 산업화의 결과이며 대부분의 농민들은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고 하늘 무서운 줄을 알고 삽니다. 약간의 밭을 일구는 저자는 가끔 찾아오는 청설모의 서리에도 불구하고 큰 원망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퇴비를 충분히 베풀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합니다. 이런 겸허함이 아마 농심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순례>에는 K선배란 분이 자주 나왔는데 이 책에는 어느 후배가 가끔 언급됩니다. 저자는 언제나 초월을 염두에 두고 살지만 후배분은 효용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p36). 예를 들어 남녀의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동기로 시작하여 가장 이타적인 소통으로 서로의 시간을 채우는 상호작용이고 감정형성 과정인데, 당사자들의 좋은 마음도 이 세상의 각박한 계산과 속물성 앞에 압살되는 게 보통입니다. 헤어지게 되는 대부분 원인은 남들과의 비교인데, 그 남들이라는 게 알고보면 대단히 추상적이고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면서 구체적인 실존 연인들을 아주 강하게 압박하고 들어옵니다. 이게 요즘 세상 사는 힘든 점입니다.   

저는 못 읽어 봤지만 저자는 한겨레에 장편 <소금>을 연재한 적 있습니다. p112에 그 내용이 조금 소개되는데 여기서 주인공 선명우가 가출하는 이유는 "소비를 뒤쫓아가는 일에 지쳐서"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생애 전반부를 "생산성의 노예로 살았다"고 자평합니다. 이 말은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할 듯합니다. 단지 그 인식의 결과가 가출일지, 출가일지, 혹은 그냥 종전처럼 무기력한 순응일지가 다를 뿐. "신자유주의 세계화, 글로벌 체제가 부추기는 욕망의 아우성" 같은 표현이 p129에도 나옵니다. p187에서 젊은 시절 우울한 청년이었던 자신이 나중에 어떻게 <소금>을 짓게 되었는지 잠시 설명을 합니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감사와 함께. 

여기서 저자가 성장배경으로 삼아 얘기하는 강경은 현재는 행정구역상 논산시의 일부인 고장입니다. 과거 상업 중심지로 기능했지만 이 책에서 말하듯 그윽한 전통의 풍미도 여전히 간직한 곳인 듯합니다. <더러운 책상> 등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습니다. 옥녀봉(강경 소재)이 자신 문학의 자궁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연속 반복됩니다. 

구체적으로 사건 명을 거론하기는 좀 망설여지는데 여튼 이 말씀 하시는 걸로 봐서 적어도 이 한 편의 짧은 글은 쓰신지가 좀 되었구나 생각되었습니다. 여튼 결론은 "서로 사랑합시다!"입니다. 주변에 다른 분들하고는 다소 결이 다른데 여튼 이런 말씀에도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다른 분들 주장이 그릇되었다는 게 아니라 이 말도 저 말도 맞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독자 중에 희생자 가족분이 계셔서 일부러 찾아오셔서 작가분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는데 당연히 그분은 그런 말씀을 하실 만합니다. 

p121의 <봄꿈>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론하기 때문에 아주 최근에 쓰신 시점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뭐 여기서도 박범신 작가의 보편적 휴머니즘, 또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기조(개개인의 자유가 소중히 다뤄져야 그 어떤 대의명분도 타락 오염 없이 온전히 구현된다)는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관됩니다. 어떤 시련이나 폭력을 당해도 여느 봄에서처럼 꽃이 피어나는 걸 보고 최종의 승리가 과연 누구 편에 설지는 이미 정해졌다고 말씀하시는 작가님이 독자 입장에서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p245에 보면 "농민도 정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비뚤어진 판단을 내릴 만큼 학문을 가진 농민을 사랑한다"는 몽테뉴의 말을 인용하며, 집필실을 논산으로 옮긴 후 더욱 농민들의 삶을 밀착하여 보게 된 작가님의 진심 표명이겠습니다. "보편적 삶에 미치는 政, 官의 위세가 여전히 매우 강력하며 거의 결정적이다"는 말씀이 참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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