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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 ㅣ 인문여행 시리즈 10
이향우 글.그림, 나각순 감수 / 인문산책 / 2023년 4월
평점 :
이향우 선생님이 계속 써 주시는 힐링여행 시리즈는 정말로 읽다 보면 힐링이 됩니다. 모든 인문 현상이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예전엔 무심히 들어가서 둘러보다 적당히 사진만 찍고 나왔던 고궁들이, 선생님의 사진과 글을 읽고 난 후엔 never be the same, 전혀 다른 의미로 보이고 느껴집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었으면 아직 그 느낌이 가시기 전에 해당 궁궐을 반드시 찾아보는 게 옳겠지만, 예쁘고 깊이 있는 책 읽기는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체험이고 마음을 살찌우는 뜻깊은 여정입니다.
아관파천은 물론 일국의 지존이 타국의 외교공관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는 굴욕적이고 민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을미사변 직후에 터졌다는 상황으로부터 어떤 불가피함 같은 것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미쪽 동맹은 그쪽에 호감을 갖는 약소국을 살갑게 맞아주지 않는 어떤 경향성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러니 대군주도 일제로부터 탈출구는 마련해야겠고 찾다찾다 피한 곳이 러시아 공사관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역시 듬직한 동맹과는 거리가 멀었고 특히 여기는 처음에 말로 그럴싸하게 대국처럼 굴며 해 댄 약속이 끝에 가면 모조리 공수표로 끝난다는 게 문제입니다.
p77을 보면 금천교의 위치가 점차 이동하여 현재와는 제법 떨어진 곳에 자리했음이 추정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종께서 아관으로부터 환궁 당시 아직 중화전이 건립되지 않았음을 일단 지적하며, 이 굵직한 전제로부터 치밀하게 구체적인 경위 사실들이 추론됩니다. 선생님의 책은 이 재미에 읽게 됩니다. 선생님 눈에는 금천교가 지금처럼 "답답한"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구한말 황실 관계자들도 미학적으로 이런저런 궁내 구조물의 조경에 대해 궁색한, 혹은 무신경한 안목을 갖지는 않았겠죠. 일제와 러시아 사이에서 워낙 황실이 핍박을 받다 보니 미처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며 그래서 지금까지 남은 저런 흔적들에 우리들은 더욱 설움이 솟는다고 하겠습니다.
p102에는 석어당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임금께서 전에 머물렀음을 저 두 글자에 담았는데 이런 걸 보면 확실히 한자만이 풍기는 아취(雅趣)가 있습니다. 한국에 다층 건물이 부족하다고 하나 건물이란 필요한 만큼만 쌓아올리면 그만이며 공연히 백성을 아래로 깔아보며 위압적으로 굴 필요는 없습니다. 여민락(與民樂)이란 말 뜻을 한번 새겨 보십시오. p103의 동궐도를 보면 2층 건물이 안정적으로 뷰를 취하면서도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설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p79의 그림도 덕수궁 중화전이 궁궐 전체에서 어떤 위상인지 이해하게 돕는 측면 사시도입니다. p118 이하에는 또한 석어당 하면 빠질 수 없는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회고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경운궁으로 고종이 환어(還御)한 게 1897년이며 p179에 잘 나오듯 그해 시월에 고종은 황제국을 선포합니다. 고종이 소년 이명복 시절 즉위한 곳은 즉조당이 아니었으나 본격적으로 정무를 보면서는 즉조당이 주된 거처였고, 그의 세자 순종도 즉조당에서 제위에 올랐습니다. 책 여러 곳에 나오듯 비운의 임금 인조 역시 이곳에서 등극했으니 그리 운수가 길한 곳은 아니겠네요. 병자호란 역시 까딱했으면 망국으로 치달을 뻔한 대사건이었으니 말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덕수궁 하면 "돌담길" 다음으로 떠올리는 게 역설적으로 석조전입니다. 이 석조전은 궁궐 안에 자리한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건물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한데, 총 12년 간에 걸쳐 완공된 이 건물은 하필 황실이 가장 어수선하던 시절에 지어진지라 애초 어떤 의도로 설계되었는지, 어떤 구조 하에 어떤 기능을 수행할 예정이었는지 명확히 전해지는 바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향우 선생님처럼 일단 궁궐 자체에 애정을 갖고 건축물에 대한 체계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의 설명과 가이드가, 특히 이 덕수궁 석조전 같은 유적에 대해서는 더욱 필요합니다. 과연 책에는 석조전이 큰 영향을 받았을 만한, 이오니아식 주두를 채용한 유럽 여러 건물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됩니다.
책에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천연색 도판이 실렸습니다. 황은열 작가님의 사진도 많고,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여러 상황에서는 최대한 당시를 정확히 재현한 그림들이 실렸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당대인들도 정확히 알기 힘들었을 덕수궁 전경과 내밀한 구조에까지 입체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유독 아픈 역사 여러 자락을 간직한 덕수궁의 사연을 반추하면서 겨레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펼 수 있겠네요. 역시 미술서적에 강한 인문산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