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아시아에서 발전한 스포츠 중에는 내가 아닌 상대방의 강한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이 발달한 게 있습니다. 일본의 유도나 한국의 씨름이 특히 그렇습니다. 타고난 신체 능력, 권력 관계 같은 게 처음에 고정된 그대로만 가면 사람 사는 세상에 재미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어떤 발전 같은 것도 기대하기 힘들게 됩니다. 어떤 의외성 같은 게 언제나 있어야 하며, 인간이란 동물은 본래 뻔한 것, 재미없는 걸 못 견뎌 합니다. 이 책에는 모두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렸습니다. 앞의 세 편은 김지현이라는 중년 여성이 1인칭 주인공이며 그 정체는 연쇄연애범(p229, p251 등)입니다. p134에 전남친 리스트가 죽 나옵니다. p165에선 그녀의 유명한 남성 편력을 드러내는 "태풍순이'라는 별명도 소개됩니다. 중간의 두 편 주인공은 홍지운이라는 남성이며 앞의 김지현과 동갑이고 묘한 인연으로 엮인 사이입니다. 마지막 두 편은 김지현의 아들 재우가 주인공인데 앞의 홍지운, 그의 처 연수와 역시 독특한 인연으로 맺어졌습니다. 각 편을 독립된 소설로 읽어도 되고 하나의 긴 장편이 7챕터로 나뉘었다고 봐도 되겠네요. 책 전체 제목은 "씨름왕"인데 둘째 작품의 제목을 겸했습니다. 제목과는 달리 토속적인 느낌은 전혀 없고 내내 지나칠 만큼 도회적인 분위기인데다 병적일 만큼 시크한 주인공들이 벌이는 찌릿찌릿하면서 비극적인 로맨스가 주조입니다. 작품 전체 주인공으로 봐도 될 김지현은 루라는 이름의 이탈리아인과 결혼 직전에 쌍둥이를 임신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사십대 후반인데 이런저런 불리한 사정을 쿨하게 이해해 주는 게 루와 그 모친입니다. 이탈리아 남성들이 그 모친과 늦은 나이까지 유대관계를 이어가는 건 학문적으로도 널리 인정되는 팩트인데 그렇다고 이 작품의 루는 캥거루족은 아니고 아주 멋진 사람 같습니다. 문제는 김지현 쪽에 있는데 쓸데없이 민감한 성격인데다 한 이성과의 관계를 진득하게 이어가질 못합니디. 청년시절 씨름 종목에서 준 프로선수였던 지현의 부친은 체력도 빼어나고 호탕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김지현의 집안이 기울게 된 경위는 넷째 작품 <줄리아나>에서 지운의 입을 통해 드러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저렇게 건강이 나빠져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지운이 지현과 그 어린 아들 재우에게 그토록 특별한 배려를 할 수 있었던 건, 지현 부친이 어려서 곤경에 처한 자신에게 보였던 특별한 호의 때문이기도 합니다(전남친 뭐 이런 것보다). 그 일화는 제3자가 보기에도 정말 흐뭇한데, 참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어렵게 상품으로 타낸 황소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인들에게 잔치 메뉴로 대접하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낭만적인 분들이 악착같이 재물모으는 데는 서투른 면이 공통적으로 있습니다. 줄리아나 나이트클럽은 p131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뭔가 이름에서부터 기대가 되더니만 기어이 화자까지 바뀌어서 바로 다음에 독립된 작품의 제목으로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남농이 꽤 인기종목이었고 김지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그 소동은 이 점을 감안해야 더 재미나게 다가옵니다. 열정적인 성품의 김지현은 아이를 밴 채 배꼽티를 입고 2002 피파월드컵 거리 응원에 나서는데 이 장면도 작품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눈 앞에 떠오를 만큼 잘 묘사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진짜 주인공은 지운의 전처 연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운과 지현과는 달리 연수는 어려서 내내 불리한 환경에서 자라난 듯합니다. 지운이야 지현 집안에 진 빚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연수는 구태여 지현과 재우에게 그런 배려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이런저런 계산 없이 인간적인 호의를 베푼 것 아닐까요? 마지막에 참된 성 정체성(이것도 의문입니다. 성범죄 트라우마 때문에 생긴 일시적 장애가 아니었을지)을 일깨웠다곤 하지만 그 "더치 우먼"은 철저히 연수를 이용하려 든 것뿐인데도 연수는 그냥 자기가 좋으니까 기꺼이 이용을 당해 줍니다. 지현은 관계를 지속 못 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필 그 중에서 결혼할 남자의 품질을 감별하는 능력도 서투릅니다. 재우의 생부는 이혼 후에도 기어이 속을 썩이고 급기야 아들을 전과자로 만들기 직전까지 갑니다. 항상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지만 결국은 언제나 상황에 떠밀리고 손해보는 쪽이었던 지현은 이제 처음으로 "들배지기"를 느껴본다고 하지만 더 지켜 봐야 할 듯합니다. 확실한 건, 많이 늦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그녀의 인생에 어떤 반전이 필요하단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