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기본소득 - 자유로운 사회, 합리적인 경제를 향한 거대한 전환
필리프 판 파레이스.야니크 판데르보흐트 지음, 홍기빈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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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유력 정치인이 의제화한 후 일반에 널리 알려지고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된 기본소득. 그러나 정작 그 정확한 의미는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진영 안에서도 완전히 합의된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혹 한국 사회에 전면적으로, 전향적으로 이 제도가 도입된다 해도 어떤 모습으로 시행될지는 정해진 바가 없고, 각자가 각자의 생각과 기대대로 여러 가지 논변을 펼 뿐입니다. 지금 이 책도 두 분 벨기에 학자의 주장을 주로 담은 내용이지만(그 중에서도 판 파레이스 박사), 한국에 출간된 책들 중에서는 아직까지도 가장 포괄적으로 여러 입장들을 두루 소개하고 분석하며, 기본소득의 여러 얼굴과 미래상, 다양한 가능성을 대중에게 소개한 책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640여 페이지로 그 분량도 무척 많습니다. 

p30을 보면 브라질의 기본소득 운동가 에두아르도 수플리시의 말이 인용됩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는 문으로 나가면 된다." 이 말은, 한 국가의 빈곤이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회가 미래에 번영하고 안하고는 그 젊은 세대의 잠재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달렸겠는데, 사회의 질 높은 일자리가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젊은 자원에게 돌아가야지, 그렇지 않고 그저 그 부모가 부유해서 지원을 많이 해 준 이들이 차지할 뿐이라면 그 사회는 발전 가능성이 서서히 닫혀 간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 점까지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엇인가에 특화한 2년제 전문대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지원이 이뤄지고, 학교를 나와서 바로 사회에 투입되는 인력이 더 큰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여성의 경우 비교적 쉽게 준비할 수 있는 간호조무사직, 미용직, 경리직 등도 사회에서 지금처럼 비하, 조롱, 폄하하는 분위기가 해소되어야 합니다. 이게 안 나아지면 결국은 젊은 여성들이 다들 얼굴 꾸미고 술 따르는 일에나 몰려들 것이며 뭐 실제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른바 3D 업종을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결국 동남아시아인, 중국인들에 의해 일자리가 채워지는 건데, 젊은이들도 보수가 조금만 향상되고 작업 여건만 개선된다면 배달보다야 그 일을 하려고 들 것입니다. 하다못해 사회적 편견이라도 개선되면 좋을 텐데 그게 제일 힘들죠. 이 작은 나라에서 대체 왜 그렇게들 위아래를 나누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마약 연예인, 혹은 국제대회에 나갔다 하면 광탈하여 나라 망신시키는 한심한 직업운동선수 따위보다 사회에 훨씬 더 필요한 일들인데도 말입니다. 

저자는 부유층 자제의 경우 이미 그 부모로부터 "기본소득"을 받고 있기에 자신을계발할 기회가 생기니, 그렇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주자고 합니다. 이 역시 두루 동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장 한국의 보수 단체장 하에서도 청년 지원 방안은 실행이 현재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서울시).  

다음으로, 저자는 장년층 이상의 경우에도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그 사람이 현재의 직장 업무에만 매몰되다 일정 연령이 지난 후 퇴물로 폐기되는 일을 막고 꾸준히 자신의 적성을 계발하여 노년에까지 일정 쓰임새를 갖는 사회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장년기부터 남는 시간에 자신의 다른 재능을 계발할 수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이상적 상황만을 가정한 결론이 아닐까 싶네요. 아무튼 바람직하게 제도 보완만 이뤄진다면, 혹 (기본소득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장려되어야 할 방향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공리주의의 근대적 종합자, 제창자로 알고 있는 제레미 벤담의 경우 "소유가 없는 개인들은 스스로를 자기 노동으로 부양하는 계급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부양 받는 계급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태라는 건, 현재는 유한 계급에 국한된 풍조지만, 금세 다른 계급으로까지 확산되어마침내 타인을 위해 노동할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는 상태까지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p150)고 합니다. 이 책은 비록 대중서에 가깝지만 현재 기본소득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학자의 저작답게 방대한 주석들이 달려 있어서 추가 독서를 원하는 이들에게 편리합니다(이 부분 출전은 본문에도 있고, p170의 챕터 후주에도 다시 나옵니다). 여튼 이 대목을 읽으면 후기 조선 사화가 왜 그토록 비생산적이고 무기력했는지와 연결되는 상념이 생기네요. 

당시 벤담은 빈곤층에게 기초 생활 물자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의 자녀들이 강제로 끌려나와 대가를 노역으로 갚을 수 있는 industry houses의 설치를 제안했다고도 합니다. ㅎㅎ 물론 옛날 이야기이며, 이 책 p66에 나오듯 기본소득의 본질 중 하나는 "무조건성"입니다. 다만 어떤 경제사상이든 간에 평지돌출은 없으며 이러이러한 변형, 발전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 벤담 개인뿐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의 사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사실 21세기인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은연중에 지지를 보낼 만한 제안이며, 남은 죽자살자 일하는데 누구는 놀고먹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발은 그것대로 충분히 수긍이 됩니다. 

프랑스는 두 차례의 혁명, 즉 부르주아의 왕정 폐지와 도버 해협 건너로부터 밀려온 산업 혁명을 겪으며 사회 구조적 모순이 유발한 빈곤 이슈를 맞닥뜨립니다. 그전에는 귀족의 자선과, 방대한 자산을 지녔던 교회(구교)의 본연 기능에 의존했었는데 이제 그 둘이 모두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이 영향으로 새로운 유형의 사조가 대두했는데 이후 칼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라 비판한 생시몽, 푸리에, 오웬이 그들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푸리에의 아이디어 일부를 받아들여 기본소득 사상의 원형이 될 만한 논의를 내놓았는데 이 역시 현대적 시선으로 재고찰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논자들은 기본소득제에 필연적으로 마이너스 소득세 개념이 들어가는 줄로만 알지만 이 책 p34에 나오듯이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부(負)의 소득세 아이디어는 미시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졌지만(특히 이준구 著 등) 이처럼 세련되게, 또 치밀하게 다듬어진 건 이 책 p202에 나오듯이 밀턴 프리드먼의 공입니다. 이분은 주지하는 대로 시카고 보이즈이니 말입니다^^ 뛰어난 인사이트를 지닌 천재는 반대진영에 미리, 선제적으로 무거운 짐을 두고두고 지우는 재능을 뽐냅니다. 

무상급여는 논리적으로 노동 공급 부족을 야기합니다. 이는, 그 정도와 범위에서 차이가 있을 뿐 주장 자체는 누구로부터도 수긍되는 것입니다. 당장 코로나19 사태 때에도 미국에서 2000달러씩 보편 지급이 이뤄지자 트럭 운전수들이 일선에 나오지 않아 물류비용이 수직상승, 물류 자체가 스톱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또 현재 우리가 겪는 고금리, 물가상승의 고역도 상당 부분이 그 부작용입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응당 예상되는 이 주장에 대해 재원 마련 등 치밀한 반론 체계,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 책에서 가장 볼만한 파트가 이 대목입니다. 특히 저자들은 계량경제학적 논거(반론 포함)도 여럿 제시합니다. 

우리가 기본소득 하면 대번에 떠올리는 게 핀란드입니다. 중국이 한반도 정치 단위에 대해 "핀란드화"를 대놓고 제안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는 왜 겨울전쟁 같은 영웅적 항쟁을 벌인 핀란드인들이 전후 "중성화 조치"를 그렇게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가끔 의문이 듭니다. 하나의 답은 p434 이하에 잘 나오듯 그 나름 뿌리가 깊은 핀란드의 진보 정치 진영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결국 세계에서 가장 앞선 템포로 기본소득제 역시도 수용, 집행, 전파하는 것입니다. 결국 핀란드인들은 그들의 지정학적 위치,산업여건 등을 감안하여 생존의 지혜를 발휘, 우리처럼 분단을 겪지 않고 단합을 유지했던 거죠. 이게 반드시 옳다는 게 아니라, 그건 그것대로 그들이 찾은 답이란 뜻입니다. 

한 나라에서 기본소득제를 전면실시하면 두뇌 유출과 (거꾸로)빈민 유입, 즉 선택적 이민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p513). 이 책은 그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합니다. 책을 읽으며 여태 이처럼 많은 논의가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이 들었으며 특히 피에터 쿠이스트라라는 20세기 어느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건 가외의 소득입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역자 홍기빈 소장의 저술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으며 이 책이 관련 주제 웬만한 세미나에서 교재로 쓰이기 좋게 만들어 준 데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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