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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비
청예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3월
평점 :
어리석게도 인간은 지구를 자신들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파멸적인 수단인 핵무기를 발명하여 70년 넘게 머리에 인 채 살고 있습니다. 인류가 멸종한 후에도 지구는 그 표면에 다른 생명체를 번성시킨 채 여전히 태양 둘레를 공전하겠지만 인간이 수만 년 동안 분투한 성과는 형해화할 것입니다.
소설은 인간이 다섯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고 크게 훼손된 환경에서 여전히 살아가는데, 방사능으로 가득찬 사탕비라는 게 하늘에서 내려 이걸 맞으면 죽는 극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저 사탕으로부터 네 가지 성분과 물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빨, 주, 노, 초, 보 각각의 성분(p23)은 인간을 불로장생할 수 있게 돕습니다. 그러니 이 사탕비라는 게 재앙인지 축복인지 모를 판인데, 다만 사탕비는 지면에 닿자마자 녹으므로 누군가가 짧은 시간 동안 받아와야 하며 그 일을 기계인 캔디인간, 휴머노이드가 맡아 하게 개발되었습니다.
이 기계가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본연의 임무를 거부하고 인간 사이에 숨어들었으며 외견상 구별할 수 없으므로 투표를 통해 의심되는 자를 뽑아 사탕비가 내릴 때 밖에 내보내 사탕을 받아오게 합니다. 기계가 맞으면 계속 일을 시킬 수 있으며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의 몸에 박힌 사탕을 비가 그친 후 거두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마시안은 이 상황이 대단히 부조리하다고 여기며, 동갑인 시온과 함께 누가 휴머노이드인지 색출(p60, p99, p163)하려고 마음 먹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간(죽어갈)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사람 사이에 숨어든 기계에 대한 증오심 등이 그 동기입니다. 그런데 기계와 인간 사이에 정말 공존은 불가능할까요? 이 당연한 의문은 p190까지 가서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런 극한상황에서도 사치를 부리려 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사탕 정제인인 솔라는 시안에게 특별한 선심을 쓰며 민트색 사탕을 건네는데 앞에 나온 다섯 가지 성분과는 다릅니다(p35).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꼭 포만감이 느껴질 필요는 없기에 이것이 쓰인다고 하네요. 이 시대에도 이른바 헬창이란 부류가 있으며 테라가 그에 해당하는데 자신을 슈퍼맨(p96)이라고 칭하는 걸로 보아 자의식 과잉이며 "꽃 대신 널 꺾어도 되"냐고 묻는 걸로 봐서 정말 느끼한 스타일입니다. 그렇다고 그게 죄까지는 아닙니다.
"쫄보들뿐이고만?(p64)" 주인공들은 기계와 인간이 구별되는 지점이, 용기(p45)가 있고 없고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사람다움의 공식(p44)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눕니다. 이 와중 6614호에 사는 수수께끼의 발명가는 놀라운 재주를 선보이며 시안을 놀라게 하지만 어떤 특별한 단서까지는 내놓지 않습니다. 여전히 시안들은 오리무중에 빠졌고, 억울하게 남편을 잃었던 리카 할머니의 절규도 들어야 합니다. 구별하는 법을 안다는 리카 할머니는 5층에 사는데 건물의 층고에 따라 거주자의 신분이 갈리는 건 2015년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 영화 <하이-라이즈>의 설정과도 닮았습니다.
인간다움의 조건과 반대로 기계의 본성은 가소성(p139, p202)에 있다고 합니다. 이게 "자가회복을 기반으로 한 관성으로 살아가는" 인간과 근본적으로 저 캔디인간이 다른 점이라서, 한번 시스템이 뒤틀리면 뒤틀린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기이합니다. 그래서 "가장 인간을 치열하게 모방하는 자(p142)"가 바로 캔디인간, 휴머노이드, 기계라고 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알고보니 인간들이란 제각각의 이유로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며(p245), 가소성이란 관성보다 더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p203). p267에서는 결국 둘(가소성, 용기)은 하나였음이 드러납니다.
"인간을 이토록 미워하는 그녀(정제인 솔라)가 인간일 리 없어. 죽여야 해!(p80)" 그런데 결국 그녀의 결백도 드러나고, 사람(타인)을 미워하는 데 구태여 휴머노이드 캔디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점만 역설적으로 확인됩니다. 사람을 죽일 정도로 미워하고, 남들의 불행에 아랑곳않는(p213) 건 알고보니 사람이 더합니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시안의 경솔하고 무책임한 언행도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p172)이나 무고한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결말이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oo이라든가, oooo 머리를 한 oo를 의심했었으나 진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는... 이 소설은 SF의 외피를 썼지만 추리소설처럼 전개되며, 아마도 본격 추리 장르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그 누군가를 범인으로 숨겨 놓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지적인 구조이지만 동시에 많이 슬픕니다. 음... oo의 슬픔이 종이 너머까지 전해 오는 듯합니다. 또다른 나들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장면에서 1998년작 <에일리언 레저렉션>이 떠오르기도 했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