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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들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월
평점 :
지난시절 법정 스릴러의 거장 존 그리샴이 간만에 자신의 장기를 갖고 컴백했습니다. 그리샴의 법정물은 완성도나 흥미도 빼어나지만 주제가 건전하고 보편적 교훈과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아서 독자들이 더 큰 사랑을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법정물에는 자주 기결수, 그 중에서도 사형이 이미 확정 선고되었고 상고 기회도 다 써버린 죄수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물론 아무리 확정 판결이 났어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하면 다시 재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만 이런 청구가 받아들여질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모두가 포기해 버린 이런 사건, 이런 죄수 편을 들어 동분서주하는 변호사, 혹은 법대생이 활약하는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심지어 이런 사건 이런 죄수들은 처음에 대중의 여론조차 무척 좋지 못합니다. 그런 자를 뭐하러 편드냐는 식입니다.
"노래하는 카나리아."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범죄자들은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별의별 증언을 내놓기 마련입니다. 범죄조직도 이런 배신자, 밀고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골머리를 썩히죠. 밀고자는 본래가 예측이 안 되(p68)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보편적이고 성숙한 가치관에 입각한 그리샴 식의 멋진 교훈이 등장합니다. "복수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세요(p69)." 하지만 당사자 퀸시의 생각은 다른가 봅니다. 퀸시는 이 상황에서도 칼을 갈고 치를 떱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충분히 이유와 명분이 있죠.
집행 재고를 청할 만한 죄수 중에서도 성범죄자만큼은 예외로 취급합니다. p125에 나오는 무고는 우리 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실제 있었던 사건과 매우 닮았습니다. 뭐 본인은 미치고 환장할 일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제럴드 쿡 씨가 당한 저런 봉변은 평소에 그가 불성실하게 산 탓이 없다고 못합니다. 이런 악질 무고가 가능하려면 못된 꾀를 알려주는 악질 변호사가 있어야 가능했겠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컬런 포스트는 그런 악당들에 맞서는 백기사이고 말입니다.
p154 이하에 나오는 "진술서"라는 건 아마 affidavit이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런 양식에 독자적인 증거능력과 증거력을 부여하지 않으므로 낯설지만 미국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쓰이므로 소설이나 영화에서 국면 전환시 중요 계기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문제는, 극단적인 경우 당사자가 이를 뒤집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변호사나 검사가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가죠.
"밀러를 석방하려면 당신이 진범을 밝혀야만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 사람이 무고하다는 것만 밝히면 됩니다."(p187) 컬런 포스트의 케이스들뿐 아니라 모든 형사사건이 다 그렇지만 피고나 그 변호사는 자신의 무죄만 밝히면 그만이고 진범(혹은 또다른 억울한 피의자)을 대신 피고석, 포승줄에 채워넣고 빠져나와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허나 많은 스릴러, 추리물에서는 그런 식으로(즉, 진범 적발) 멋지게 누명을 벗는 결말이 꽃피죠. 독자들 후련하라고. 반대로 어떤 희한한 작품은, 바르게 검거된 진범이 억울한 타인을 교묘하게 얽어넣은 후 무죄방면(acquittal)되는 플롯을 쓰기도 합니다. "여기 진범이 따로 있는데 내가 어떻게 범인이겠습니까?"
"나는 변호사 생활의 대부분을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보냈고 교도소의 폭력적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무감각해지지는 않았다.(p319)" 역시 그리샴의 주인공 다운 멋진 말입니다. 변호사가 꼭 아니라 우리 평범한 시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이나 뉴스에서 접하는 각양각색의 부조리와 불의에 매번 타격을 입지는않고, 어느정도는 무덤덤해지거나 체념합니다. 하지만 양심으로 이를 용인하지는 않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배우자, 부모 될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입니다.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서 힘들게 루틴을 맴도는 우리들에게 그리샴의 주인공들은 무엇이 정도(正道)였는지, 초심이었는지, what you gotta do였는지 감동적으로 환기해 줍니다. "어이, 그쪽이 아니잖아!"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