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특권은 뭐니뭐니해도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소설 속에서는 특히 수인이가 그러한데, 애착이불 속 양(羊) 캐릭터인 "하나"도 그렇고(p54), 얘가 만들어낸 도깨비 캐릭터인 벼리도 그렇습니다. 혹은 강아지 "짱이(얘는 실제)"라든가 말입니다(짱이는 뒤 p87에 다시 나옵니다). 마치 요즘 드라마 <빨간풍선>에서 미풍이가 집착하는 낡은 인형 똘망이하고도 비슷합니다. 주영은 딸이 이렇게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할 줄은 아마 몰랐을 겁니다. 언제나 가정보다는 일이 우선이었고(p35) 완벽주의자였던(p21) 주영은 이제 시골 본가로 돌아와 그간 무엇이 그토록 자신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는지 조용히 반추합니다. 김서방(p89). 왜 따로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 도깨비들은 사람들을 퉁쳐서 김서방이라 부르는 걸까요. 사실 우리도 모든 도깨비들을 싸잡아 도깨비라고 부르니 누가 누구의 무신경을 탓할 자격은 없습니다. 여튼 이 벼리라는 애는 원래 수인이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녀석으로 여겼으나, 이제 주영 자신이 딸의 행방을 찾는 데 요긴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이는 작은 김서방(p90)이고 말입니다. "당연하지! 우린 친구였잖아!"(p110) 세상에. 알고보니 주영도 이 도깨비 무리들과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너 아까는 내가 늙어서 못 알아본 것 아니었어?(p122)"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사람은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을 때 제일 신경쓰이는 게 내가 상대보다 더 늙었는지 아닌지입니다. 이 미묘한 포인트를 배려 못 받으면 오랜만에 누굴 안 만난 만도 못합니다. 이곳에서는 안 되는 게 없습니다(뭐 물론 자체 규칙에 따라, 어떤 안되는 건 여전히 안 되겠지만). 1년 전에 죽은 강아지 짱이를 수인이는 여기서 만납니다(p144). 명순은 대체 왜 이 아이(수인)가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르는지 영문을 알지 못합니다. 어둑서니의 결계(p139)를 넘어서면 시간 역시 과거와 미래가 조우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기 전의 기억을 가지기도 한(p131) 도깨비들이야 뭐 그러려니 해도 말입니다. 완벽주의자 주영은 지금 딸 수인이를 찾아 심지어 도깨비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이 고생이지만 사실 그 역시 아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떠나보내다시피 했었네요. 기중이라는 이름의 아빠는 그간 주영의 세계에서 밀려난 타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정체 모를 할머니 말을 들어 보니, 주영은 엄마에 대한 기억도 어느새 저 먼 구석으로 밀어넣은 후였습니다. 수인을 잃고 이 고생을 하는 게 다 그 업보였던 걸까요? "엄마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p168)." 결국 아까 그분 명순과 주영도 만납니다. 수인이한테 할머니니까 주영에게 당연히 어머니인 분이죠. 우리는 누구나 기억을 간직하고 살며, 때로는 그 기억 안에 자신을 거두며 때로는 왜곡된 기억으로 타인, 심지어 나 자신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어떤 도깨비라도 갑자기 나타나 결계를 넘게 돕지 않는 이상 이런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