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들은 대체로 일상이나 일 관련 모든 절차를 자신의 장악, 통제 하에 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 책 저자는 그런 지나친 집착이나 완벽주의를 고수해 봤자 우리에게 어떤 가시적 성과가 주어지는 건 아니며, 혹 그렇다 한들 치르는 비용에 비해 수익이 적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가성비가 떨어지는 공연한 헛수고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고 싶다면 다소의 블확실성이 남아 있어야 하며 이런 불확실성에 너무 여지를 주지 않으면 훨씬 삶이 각박해지고 피곤해진다는 주장인 듯합니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학교를 거쳐 직장을 다니는 중 줄곧 "무엇이 되길" 강요받아 왔습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건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존귀한 존재이며 나이가 어리든 지위가 낮든 그 반대편의 사람들(사회적 위상이 높은 어른들)보다 인격적으로 못한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남들에게, 혹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 존중받을 이유가 충분한데 왜 그를 넘어 또다른 무엇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내가 더 나은 무엇으로 탈바꿈해야 하고 무엇을 성취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 자체가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첫번째 원인입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여성을 혐오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저자는 피그말리온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인물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혐오스러운 여성상을 만들어내고 그의 안티테제라 할 갈라테이아를 조각해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지적합니다. 사실 그 결과물에 대해 얼마나 주관적으로 뿌듯해하는지와 무관하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고통스러운 자기 부정(self-denial)을 거쳐야 했겠습니까. 저자는 애초부터 여성혐오라는 감옥 안에 피그말리온이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면 훨씬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라는 주장인 거죠. ㅎㅎ 대단히 흥미롭다고 생각했으며, 이 말이 아주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인생도 뭐 있긴 할 것입니다. "공감이 없는 착함은 공허하다." 그런데 이미 착함이라는 건, 어떤 가치에 대한 강한 공감을 내포한 개념이죠. 공감은 착함의 필요조건이며 착함은 공감의 충분조건입니다. 공감없는 착함은 착함이 아니라 기회를 보아 유리한 쪽에 붙겠다는 위선이며 공허한 레벨에만 그저 머무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의견의 갈림이 있을 수 있는 이슈에 대해 무조건 특정 방향으로만 공감을 강요한다면 이는 폭력에 가깝습니다. "고인에게 명복을 빕니다"보다 "I'm sorry for yoir loss."가 더 공감지향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날카롭습니다. 요즘 중년남성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큰 인기를 모으는 <슬램덩크>에서 서태웅은 처음에 자기밖에 모르는 플레이어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농구는 개인 종목이 아니라 팀 플레이이기 때문이죠. 자신 외에 다른 팀 동료들도 배려하는 선수라야 진정한 최고가 될 수 있겠습니다. 샐러리캡 같은 제도가 있는 이유도 어쩌면 이쪽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