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학서가 최근의 것을 읽어야 한다면 인문학은 오래된 과거를 읽어야 한다(p23)." 인류사를 통해 찬연히 빛나는 숱한 고전들이 있습니다만 호메로스라는 이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일리아스>는 그 중에서도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애독되며 미국 중고교생들에게도 명문대학 진학을 위해 필수로 읽히는 명작입니다. 어떤 실용적 목적을 반드시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일리아스>는 그저 무용담이나 설화로 읽어도 재미가 납니다.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펼쳐지며 오늘날까지 널리 인용되는 관용구들의 출전 구실까지 합니다. 이 책은 그런 고전 <일리아스>를 제대로, 또 더 재미나게 읽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 매뉴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제라면 그간 여러 책들이 나왔었습니다만, 이 책은 깊이 있는 해제 노릇도 할 뿐 아니라, 마치 게임 유저들을 위한 가이드북처럼 온갖 흥미로운 배경지식을 꽤 두꺼운 한 권의 책 안에 잔뜩 담아 놓았습니다(p34을 보면 게임에 대한 말씀도 있네요). 동양 고전 중 나관중 삼국연의에라면 이미 이런 책들이 많이 마련되었습니다만 헬라 고전은 국내에서는 이런 정보가 많이 부족했는데 이제 이 책 덕분에 그런 갈증이 꽤 해소될 것 같습니다. 또 해설, 해제에 대해 저자는 "일단 원전을 읽고 나중에 읽으라"는 충고도 합니다(p49). 꼭 평론가가 아니라 해도 우리 독자들 역시 고전에 대해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할 권리가 있죠. 저자도 독자들이 반드시 자신만의 "자유분방한 이해"라는 유익하고 유쾌한 체험을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조언하는 듯합니다. 정해진 고견만을 학습한다면 즐겁기 짝이 없어야 할 고전 독서가 얼마나 고생스러운 공부에 그치겠습니까. 저자는 심지어 <논어>에도 줄기찬 재해석이 가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책 곳곳에는 동양 고전에 대한 언급이 잦으며 심지어 p321에서는 <일리아스>와 <효경>의 교차 분석까지 펼쳐집니다. 몇 주 전('22.12.22) 이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인 천병희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이 책 역시 천병희 선생의 역본을 주안에 두고 집필되었다고 책에 나옵니다(단 선생의 별세에 대해선 직접 언급은 없습니다). 천 선생께서는 생전 매우 역점을 두어 헬라 고유명사 그 바른 표기에 대해 후학들에게 가르쳤는데 이 고전 제목 "일리아스"도 포함됩니다. "일리어드"는 영어식 변형일 뿐이며,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인 영어권 학자들의 탁월한 연구에 대해서는 깊은 존중을 보낼 필요가 있겠으나 우리가 헬라스(p289)의 고전 제목을 영어식으로 읽을 필요까지는 없죠. 그래서 이 책처럼 바르게 "일리아스"라고 제목이 붙은 책은 일단 신뢰가 가는 것입니다. 고전이 현재에까지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그 안에 시대를 초월한 보편의 주제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이 책 p103을 보면 인신공양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나오는데 사실 에우리피데스의 <아가멤논>에서도 클뤼타임네스트라가 그저 평면적인 악녀 악처로 설정되지 않습니다. 출정 전 고명딸 이피게네이아를 무정하게 제물로 바치려 한 남편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동기를 형성했고 그 얘기가 이 책 p103에 나옵니다. 고전에는 또한 다양한 형태의 변신(메타모르포시스)가 나오는데 이 <일리아스>의 시퀄인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이타케의 왕 오뒷세우스(p278)가 여기(<일리아스>)서 일개 상인으로 변장하여 참전을 회피하려 드는 것도 그 일종입니다. 이 대목을 언급하며 저자는 느닷 "남장 여자 국회의원"을 거론(p97)하는데 제 추측에는 유신 때 강단 있는 행적을 보여 큰 화제가 되었던 김옥선씨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뭐 남장여인 모티브는 요즘 한국 TV 트렌디 사극들에 자주 등장하며 데즈카 오사무의 <リボンの騎士> 같은 예가 이 테마로 아주 유명합니다. 고전뿐 아니라 중세를 관통해 내려온 유럽 설화의 핵심 구조 중 하나는 주인공이 어떻게 저주에 걸렸으 며 그의 노력으로 해당 저주가 어떻게 풀리느냐가 서사 궁륭의 핵으로까지 평가되죠. 이 책 p262를 보면 아가멤논 일생을 통해 어떤 저주들이 걸리고 나중에 해소되는지 일목요연하게 도표로 정리되었네요. 며칠 전 튀르키예에 엄청난 참사가 벌어졌는데 본시 트로이아가 아나톨리아 반도 소재이며 지금 반도의 주인 노릇하는 투르크계는 아직 이 먼 소아시아에 도착하기도 전이었고, 따라서 고대 헬라 문화를 꽃피운 유적지는 튀르키예 곳곳에 분포합니다. p354 이하를 보면 터키 여행을 위한 유익한 정보로도 잘 활용될 사항이 정리되었으며 사실 여행의 진짜 묘미는 현지의 인문 지식이 곁들여질 때 그 전모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인문서 출판의 명가인 인간사랑에서 펴내는 고전 아틀리에 제2권이며 제1권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도 제가 지금 읽는 중입니다. 이 출판사의 손을 거쳐 현대적으로 재조명될 여러 고전들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