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평점 :
절판


터키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부분이 참 많은 나라입니다. 자신만의 확고한 체제중심과 자긍이 있었으나 유럽으로부터 촉발한 근대화의 물결 앞에 맥을 못 추고 반식민지 상태에 머무르다 기어이 나라가 풍비박산이 났었고, 국가의 생존 자체를 위협 받으며 독립 전쟁을 펼친 끝에 엄청나게 쪼그라든 영토만을 보유하며 간신히 국체를 지켜 냈고,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된 게 인본주의, 합리적 계몽사상, 민주주의, 남녀평등 등을 진즉에 주체적으로 수용 못 한 탓이라 자성하고 필사적으로 탈 전근대, 탈 이슬람을 시도해 왔습니다. 이 와중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적어도 민주주의와 인권 구현만큼은 한참 후퇴한 아픈 경험을 한 것까지도 비슷합니다. 

한국도 일제 강점기나 개발도상국 시절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런 근대화 도정에서 가장 피곤한 위치에 놓인 이들이 바로 여성들, 그 중에서도 총명한 두뇌를 타고났으며 사이비 아닌 정규 교육기관을 거치고 올바른 소양을 정신 속에 담아 체화한 여성 인력들이 가장 난감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게 사실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즈베리 날반트오울루 역시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터키어는 20세기 초 아라빅 스크립트를 버리고 로마자를 쓰기 때문에, 예컨대 이 책 p8에 나오는 표기를 보고 특히 "트오울루" 파트를 읽는 게 참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터키와 더욱 교류를 증대해 가야 할 한국으로서는 터키의 언어를 비롯, 문화 제반에 대한 관심을 체계적으로 늘려야 할 필요가 있겠네요.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느낀 건, 대체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집안에서도 엄마 아빠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행실 또한 반듯한 여성 인력들이, 왜 이처럼 평범한, 혹은 심지어 평범보다도 못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저렇게 재능을 썩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식자우환이라고 했던가요? 특히 저는 이 소설 초반에 나오는, 페리 자신이 모는 자가용 안에서 부랑자 패거리(중의 꼬마)한테 지갑을 탈취당하는 장면이, 어디서 온당한 적수도 아닌 지저분한, 룰도 원칙도 없이 당한 대로(이 역시 피해망상) 미러링해 주겠다는 발악이나 하는 하급의 얼치기들한테 당하는 엘리트 여성의 치욕과 곤혹을 제대로 상징하는 듯하여 한편으로 헛웃음이 나왔고, 한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터키는 근대화 과정에서 지난 이슬람 광신 시대의 인습, 혹심한 남녀차별 등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젊은세대는 국가 레벨에서 내려오는 권위주의, 혹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죠. 소설 내내 나오듯 페리의 부친은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나 살게 된 건 케말 파샤 덕분"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한, 전형적인 체제 순응적이고 보수적인 인사였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건, 저 페리의 부친이 낮게 평가하는 이란도 1979년까지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죠. 

케말 파샤는 게다가 1938년, 2차 대전 발발 전(즉 무려 팔레비 샤 즉위 전)에 타계했으니 이란의 현재 꼴이 어떻든 간에,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영향을 끼칠 만한 위치에 있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건, 터키는 이제 에르도안이라는 전혀 색다른 유형의 독재자를 맞이하여 그나마 아타튀르크 케말이 목숨을 걸고 시도했던 세속지향 - 탈종교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려 든다는 점입니다. 이게 역사의 퇴행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물론 터키는 수니, 이란은 시아이므로 둘은 영원히 화합할 수 없을 상극이긴 합니다만 만약 이 라이벌리가 광신 근본주의에의 경쟁으로 변한다면 이는 서아시아의 민중을 위해, 특히 여성들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불행한 결과를 빚을 뿐이겠습니다. 1999년만 해도 터키의 젊은이들이 TIME에 엽서를 보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큰 인물" 투표에서 케말을 1위로 올리려는 열성을 보이는 해프닝이 빚어졌으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뿐입니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주인공 페리가 못마땅해하는 젊은 사람들(p248)에는 저런 이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재미있게 본 건, 페리가 꿈꾸는 어떤 이성의 상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머리에 지성과 교양이 있는 남자라는 것이며, 그녀가 주목하는 게 고전 문학을 사랑하고 그 참된 가치를 (어떤 광신의 기준에 따라 멋대로 왜곡하고 편집을 거친 게 아닌) 있는 그대로 알아봐 줄 줄 아는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왜, 저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는데? 자기들이 한 대로 돌려받을 거야! 죗값을 받을 거라고!"(p262) 이게 바로 벤데타라는 거죠. 원한이라는 게 당대에 해소가 안 되고 그 후대에까지 계속 내려오는 겁니다. 물론 악행은 반드시 심판 받고 단죄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이, 명확히 또 당당히 그 선조들의 죄업을 계승하겠다며 전혀 반성의 기미를 안 보이고 오히려 해코지의 기억을 자랑스러워한다면 또 모를까, 아느 선에서는 이 분쟁의 악순환이 마무리는 되어야 하겠지요. 당사자가 거부한다면 뭐 답이 없겠습니다만 말입니다. 

페리는 이른바 오리엔탈리즘, 즉 유럽인들이 제멋대로 만든 동양에 대한 정형화한 비전에 집착하는 듯도 보입니다. 소설 초입(p13)에서도 그랬고, p297에서도 앨런 파커 감독의 그 화제작까지 언급합니다. 참고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사실 왜곡에 대해 공개사과를 한 적 있습니다. 그렇다고 터키 체제의 악행이 합리화되는 건 또 아닙니다. 아무튼 페리 같은 여성이 좀 이상할 만큼 "유럽의 시선"에 대해 신경쓰는 건 살짝 이해가 안 되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이방인이라! 그야말로 "에밀리 디킨슨과 우마르 하이얌"(p379)의 사이에 선 형국입니다. 

이슬람의 가장 큰 명절인 희생절은 이 소설에서 여러 번(p9, p439) 등장합니다. 무슬림들도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한 일을 알고 그 의의를 기립니다. 애초에 무슬림은 과연 무엇을 올바른 정체성으로 잡을 것인가를 놓고 내부의 투쟁, 외부와의 타협 등을 거치며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형성된 집단이며 심지어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실존적 위기를 겪으며 장폴 사르트르(p470)까지 인용합니다. 근데 심지어 이 대목에서도 여전히 유럽 시선을 의식하네요. 

남자들이 못나서 답을 못 내면 여자들이 나서야지 어쩌겠습니까. 자유를 향한 그들의 발걸음(p553)이 멀리 나가길 기대합니다. "이브의 세 딸"이란 제목은 "세 가지 열정(p547)"으로 읽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