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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영화로 읽는 ‘무진기행’,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 ‘안개’ ㅣ 김승옥 작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이 책은 1967년작, 신성일 윤정희 주연, 김수용 감독 연출 <안개>의 시나리오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당대 문단의 아이돌 김승옥 작가의 히트작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삼았으며 이 시나리오는 김승옥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 포맷으로 각색하여 더 큰 화제가 되었더랬습니다. 현재 골든글로브 수상을 노리는 박 감독의 <헤어질 결심>도 이 작품에서 모티브를 취했다고 하는데 그 작은 작년 여름에 개봉했으나 아직 보질 못해서 제 생각이란 걸 덧붙이지는 못하겠습니다.
이 책 서두에 김한민(작년에 <한산>이 개봉된) 감독, 또 고 이어령 박사가 각각 쓴 추천사가 있어서 더욱 뜻깊습니다. 같은 추천사라고는 하나 후자는 아마 이 작품 발표 당시에 쓴 듯한 평론으로부터의, 전문이 아닌 발췌문이어서 흥미롭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돋보이는 개성은 저 이어령의 평론대로 인물이나 주제가 아닌, 무진이라는 가상의 배경이 중심이 된 이미저리(imagery)의 완결된 향연 그 구현이겠습니다. 또 무진은 명백하게 지방 소도시인데도 소설이 풍기는 분위기는 거꾸로 대단히 모던합니다. 인물들이 그 나름 출세깨나 한 사람들인데다 품고 있는 고민들이 미묘한 성격이고, 나이 든 남성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꽂힌 관상화처럼 여성 교사 하인숙 캐릭터가 내내 서울을 동경하며 모종의 성적 갈등까지 은근 빚는 양상이라서 더욱 그러합니다.
사실 김승옥의 이후 1970년대 작품들을 보면 아주 의외로 대담하고 충격적인 성 묘사가 빈번합니다. 이 초기 작품은 외견상 전혀 그런 요소가 없으나 따지고 보면 특산물 하나 없이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진(津)" 자 붙은 소도시 배경이 암시하는 바부터가, 더군다나 안개(霧) 가득한 포구라면, 에로티시즘의 넉넉한 그물망에 자연스럽게 포획될 만하지 않습니까.
p25를 보면 운전수의 대사 중에 "저것도 신문쟁이라고 콧대는 높아서 ㅉㅉ"라는 게 있는데 저때도 초성투가 있었나 싶어서 좀 놀랐습니다. p27 "망서리는"이 있는데 그 당시 맞춤법에 충실한 표기이겠습니다. p37의 "극적거려"는 대사가 아니라 지문 일부이므로 이걸 사투리라고 볼 수는 없고 역시 당시 맞춤법으로 봐야 맞겠습니다. p51의 "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작도 그렇고 이 작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중년 남성들만 가득한 술자리에서, 학부를 음대로 나온 고급 인력 하인숙이 벨칸토 창법으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씬이겠습니다.
"너무, 너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분은 꽁생원이에요."
인숙은 본인도 다분히 속물이면서, 같은 속물들이 늙기까지 한 주제에 자신을 힐끔거리는 게 한심하여 저런 식으로 경멸감을 둘러 표현합니다. 주인공 윤이 봐도 그렇고 객관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이는 조 선생인데 인숙은 이번엔 다른 이유로 커트합니다. 성적 자기결정권 하나는 확실하게 행사하는 모습이지만 그리 대견하게 보이진 않습니다. 왜냐구요?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테니 저를..."(p69)
요즘 무슨 고소득 인증으로 개탄 분위기가 일고도 있지만 세상에 매춘만큼 극한 직업은 없습니다. 돈이나 알차게 모으는 이는 극소수고, 대부분은 폐인이 되거나 p75에 나오는 대로 자기 혐오(저 뒤 p154의 인숙 대사도 참조하십시오)와 외부로부터의 트라우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이 와중에도 마담은 여러 번 요염한 자태(p43 ,p85)를 드러내며 김승옥의 페르소나(엥?)인 윤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안경 두 개를 4,600원이나 주고 사서는(현 시세로 백오십만 정도?) 인숙은 다시 자신의 고급 출신을 환기하려는 듯 대학 어디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어, 음악대학?" "에이, 서울에 음대가 어디 한두 군데인가요?" 김승옥의 다른 작품 주인공들도 대개 그렇지만 윤은 분위기나 외모는 여성들의 관심을 크게 끄는 편인데 기술은 형편없습니다. 왔던 여자도 도망갈 판인데(다른 작품들에서 도망간 여자, 원수가 된 여자들 꽤 됩니다 ㅋ) 또 보면 이런 분위기에 취해 여자들이 역으로 더 달려들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여기 윤 같은 이가 진정 허허실실 강호의 최고수입니다.
(윤이 제약회사 전무인 점을 두고) "싱거운 사람 고치는 약은 안 만드시나?"
고치긴 왜 고칩니까. 그게 이분 영업비밀인데.
p127에 약방주인 김을 읍내에서 조우하는 장면에서 인숙이 "윤과 되를 번갈아 본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건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치선이가 돼지라는 뜻일까요?ㅋ "슬라트머신", "방가로" 등 1960년대에도 모던한 유흥을 추구했던 한국인들의 풍속이 읽혀 재미있었습니다.
(약스포) 이상하게도 1960, 70년대 작품들을 보면 꼭 귀향해서 이런저런 사람 만난 후 여기 윤과 같은 운명을 맞는 마무리가 많은데 아마도 이 작품이 그 원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비장감 덕에 이 작품이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각별히 기억되는 면도 있겠고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