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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삼국지
임창석 지음 / 아시아북스 / 2023년 1월
평점 :
5호 16국 시대가 끝나고 선비족의 북위가 중원을 대략 통일하였으나 강남에는 종전의 진(晉)을 계승한 여러 남조(南朝)가 굳건히 버티는 중이었고 이 와중 탁발씨의 북위는 한화(漢化) 정책을 둘러싸고 내분상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기어이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로 분할 찬탈되었고 북주가 북제를 먹었으며 이 북주는 국구 양견에 의해 찬탈되어 수나라로 이어집니다.
p95를 보면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격인 을지문덕 장군이, 난릉왕의 묘소 근처에서 영애 목염군주와 고영수(고보녕의 아들이라는 설정. p92)를 만나 도움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소설에서 영양왕은 망국 황실의 후예들인 고씨 세력을 암암리에 후원하는 설정인데, 사실 북제가 알차게 내실을 다졌다면 오히려 인접국이어서 고구려에 훨씬 위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이긴 합니다. 생전 난릉왕(고숙)의 빼어난 용모에 대해서는 소설 맨 앞 p16에서 이문진의 대사 중에 아주 잠시 언급이 되었었습니다. 단 이문진은 왜인지 "주나라를 지키던.."이라고 하는데 문맥상, 또 실제 역사상 제나라의 오타이겠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대만 포함)의 역사장편소설을 읽을 때 개인적으로 불만이었던 게, 앞부분에 나왔던 인물들이 뒤로 갈수록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 캐릭터의 낭비였습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원제 덕천가강)>이라든가, 심지어 삼국연의도 별 다를 게 없죠. 이 소설은, 적어도 앞의 난릉왕 언급 같은 장치가 뒤에서 그 나름 양념처럼 기능이 이렇게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문진은 물론 우리가 중고등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신집 5권의 저자인 그 사람입니다. 소설 p45 같은 데서 이문진은 다시 등장하는데 앞 장면에서 평원왕(영양왕의 부왕이자 온달의 장인)과 대화할 때는 그에게 왕이 말을 해라로 낮춥니다. 여기서 영양왕은 이문진이나 강이식 장군 같은 조정 중신들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이는데 왕은 그 물리적 연령에 불구하고 누구에게건 해라투가 원칙입니다만 여기서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중한 인품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읽힙니다. 더군다나 이 시점은 나라를 갓 통일한 양견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국운을 위협할 무렵이라서 이 장면의 비장감이 한층 더합니다. p179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수 양제의 침략을 격퇴한 후 (비록 면전의 호통은 아니라고 하나) 영양왕이 "이놈 광아! 욕심이 지나치구나!"를 일갈하는 장면은 그의 엄청난 기개를 표현합니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대륙이 거진 통일되어 동방의 정치단위들이 큰 위협을 받을 때 고구려의 군주들이 한결같이 영명한 인물들로 묘사된다는 건데요. 예컨대 평원왕은 이문진의 계책과 진언을 듣고 그 허점을 지적하는데 신하의 조언을 듣는 군주라기보다 초년생에 한 수 가르치는 노련한 스승처럼 보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후계자인 영양왕 역시 치밀함 전략 하에 국정을 운영하고 전란에 대비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이처럼 자기 중심을 잘 잡는 리더만 있어도 근본 있는 나라가 망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한 삼국지>인 만큼, 아무리 고구려의 비중이 크다 해도 그 외 2국의 사정이 빠질 수 없습니다. 소설 맨처음(p10)에 잠시 언급되었던 위덕왕 이야기가 p187에 이어지는데 헌왕, 법왕을 거쳐 무왕(서동)에 이르는 재미있는 사연이 많은 상상력을 곁들여 펼쳐집니다. 선화공주는 대승적 차원에서 남편이 대귀족 사택적덕의 딸과 다시 혼인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신라의 공주였던 그녀로서는 엄청난 결단과 양보심의 발휘가 필요했겠습니다.
소설에서 춘추가 유신에게 "형님은 을지문덕보다 더 큰 인물(p219)이 될 것임"을 예견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큰 인물은 벌써 그 외관에서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고, 이들의 범싱치 않은 풍모는 이미 당이나 고구려에서까지 외교적 파장을 낳은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계가 끊어져도 범상치 않은 혈통이 지속되는 게 진평왕의 세 딸 덕만, 천명, 선화 세 명이 각각 선덕여왕으로 즉위하거나, 김용춘, 백제 무왕과 결혼하여 사실상 이 시점 이후의 삼국사 새 장을 열다시피했기 때문입니다. 자칭 백정(불타의 부친), 마야부인이었던 진평왕 부처는 19세기 유럽에서 빅토리아 - 앨버트 부처와도 비슷한 위상이라고 하겠네요.
천책상장(p212)은 당 고조가 셋째 아들에게 내린 칭호인데 결국 세민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두 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빼앗다시피합니다. 그가 무능한 인물이었으면 이때부터 나라의 혼란이 시작되었겠으나(마치 수 양제가 문제로부터 권력을 넘겨받듯) 그가 불세출의 명군이었음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자장율사와 당 태종이 대담하는 장면은 물론 상상의 소산입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그와 대화를 나눈 후 해동강역에 이처럼 인재가 자주 출현하는 사실에 경악하며 "반도의 삼국이 혹 통일이라도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며 두려워합니다. 현재 중국이 간신히 국가의 꼴을 갖추고서 저가 노동력을 앞세워 세계 경제 체제에 편입되어 외화를 그러모은 후 대국 행세를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그에 합당한 존중을 보내지 않습니다. 한반도가 하필 이때 북의 유일 체제, 남의 좌우대립으로 또다시 삼분되어 중국의 위협 앞에 속수무책인 형국입니다. 작가분께서 이런 시국에 역사 소설을 창작하게 된 우국충정의 동기에 공감하며 독후감을 마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