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도 모른 채 어른이 되었다 - 융 심리학으로 다시 쓴 어린 왕자
로베르토 리마 네토 지음, 차마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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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융에 따르면 우리 모두에게는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어떤 영적인 수호자, 곧 다이몬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의 다이몬과 대화에 들어가면 실존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p7)." 한편 폰 괴테(p168)는 예술가나 작가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존재를 데몬이라고 불렀는데 아주 큰 범주에서라면 이 역시 같은 범위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튼, 브라질의 작가 로베르토 리마 네토의 멋진 창작, 혹은 패러디물인 이 책에는 여러 이름, 여러 캐릭터 들이 여러 환경, 여러 맥락에서 이 다이몬 노릇을 해 줍니다. 같은 지혜의 말이라고 해도 어린왕자, 프로메테우스, 융, 노인, 생떽쥐페리(즉 그 작가) 등의 입을 통해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시니컬하게 들리는 가르침들은 또다른 깊이와 울림을 갖는 듯합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이며, εὐδαίμων이라는 글자 안에 벌써 daimon이 들어 있었음은 의학박사 보에차트의 추천사를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야훼가 악한 신이었나요?"(p76) 이 질문에 대해 노인은 구약에 기록된 그대로의 "사실"을 앙터안에게 들려 주며 대답을 회피하려는 듯 보입니다. 독자는 적어도 노인이 야훼를 악하다고 생각하는 줄 여기며 넘어가려 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앙투안은 집요합니다. 추궁하듯 묻는 앙투안에게 노인은 다시 "그는 선함과 동시에 악하며, 양과 음을 넘어선 도(道)"라며 다시 어려운 대답을 내놓습니다. 

앙투안은 "왜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 할아버지인 아담이 지은 죄(원죄) 때문에 우리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나요? 야훼가 정의롭다면 그 죄를 먼 후손에게 물어서는 안 되지 않나요?"라 묻습니다. 노인은 "다리를 거치지 않고는 그 지점에 이를 수 없다"고 이르는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도달하는 지점 자체보다 어디를 건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우리는 완전히 의식적이게 될 때까지 윤회를 되풀이한다.(p80)" 노인은 이 말에 덧붙여 "예수는 우리에게 어린이가 되라고 한 게 아니라, '어린이처럼' 되라고 했다."면서 이 두 표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어린이 상태로(앙투안이 오해했듯이) 그대로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그간 이뤄온 성숙이라는 성과마저 무위로 돌리게 됩니다. 나이에 합당한 성숙은 그것대로 간직한 채, 단지 이웃을 배려하고 남을 쉽사리 판단하려는 마음만 주저없이 버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어린이다움 아니겠습니까.  

생떽스의 <어린 왕자> 원본에도 하품을 금하는 왕이 등장했었습니다. 그 왕은 누구로부터도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스스로를 심판하는 자"라 칭했었는데, p147에는 이와는 다른 신선한 해석이 나옵니다. 소크라테스도 인용했고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를 환기하며 오히려 최상의 지혜를 갖춰야 이 경지가 가능하다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한 정당한(proper) 평가라는 전제가 성립해야만 하겠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위기를 극복하고(p172) 그만큼 더 성숙해지는 과정입니다. 예술가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일을 잘해야 하며 (연극 속의) 살리에리처럼 늙어서 영감이 잘 안 떠오르면 그만큼 고생하게 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책에도 나오듯이, 베토벤은 노년에 접어들어 겪은 그 온갖 고생 때문이었는지 엄청난 인격적 성숙을 이루고 그 결과가 노년의 걸작에 그대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현대의 우리 감상자들이 에누리없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시련은 모두 감사한 텍스트이며 그 도중에 우리는 헛되이 나이만 먹는 치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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