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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새 길을 찾다 - 근현대사가 가르쳐준 교훈과 다가올 미래
한국의 새 길을 찾는 원로 그룹 지음, NEAR 재단 엮음 / 청림출판 / 2023년 1월
평점 :
며칠 전인 22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NEAR 재단 정덕구 이사장(김대중 정부 산업부 장관 역임) 주최로 이 책의 출판기념회가 열렸었습니다. 한국은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외부로부터 거센 도전에 시달리는 중인데도 내부적으로는 국론이 사분오열되었고 산업의 각종 경쟁력도 갈수록 뒤처지며 학계의 미래도 대단히 어두운 전망만을 남기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과 자성이 제기되었다는 전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진로가 여기서 멈추거나 퇴보할 수는 없고, 어떻게든 기존의 성과와 성취를 발판으로 삼아 찬연한 비전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 책은 한국의 원로, 석학, 신진 학자들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과 조언을 담았으며, 필진 중 상당수는 12. 22의 행사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필진의 면면만 봐도 실로 쟁쟁하며 한국 지성계의 드림팀이라 일러 부족함이 없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정덕구 이사장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회의 보다 따스한 시선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선진국도, 개발도상국도 아닌, 선진도상국이라는 어정쩡한 지점에서 고유의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압축 성장 과정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나 그 와중에 품격과 영혼을 잃어버리고 사회는 피폐해져 도무지 하나로 공유할 만한 가치와 지향점이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금세기 들어 한국에는 그동안 지불되지 않은 과거의 비용이 이연 청구되어 사회적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p31)." 다른 한편으로는 획일주의, 지나친 피해의식이 마녀사냥으로 치달아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고 창조적 소수의 재능 발현을 억압하는 등 미래지향적으로 경제 구조를 개혁해야 할 사명을 의식적으로 방기하는 통에 장기 비전까지 실종되는 퇴행적 모습마저 노출합니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은 일찍이 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는데, 정 이사장은 창조적 혁신을 우선 공공섹터에부터 단행하여 불신과 비효율의 악순환을 한시바삐 단절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김진현 전 과기부장관은 동아일보 논설위원 시절 TK라는 용어를 지면을 통해 널리 퍼뜨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1부에서 한국이 일단 근대화혁명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며, 故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동아시아에서 오직 한국인만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 개성과 자기주장이 강한 민족성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합니다(p53). 이 예언은 한 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그가 아직 한국의 충분한 발전상을 관찰하기 전인 1990년에 이미 타계했기 때문입니다.
경제 발전은 이미 일본이 소위 명치유신을 통해 이뤘고 한국전의 덕을 봤다고는 하나 전후 복구도 대단히 성공적으로 해낸 바 있습니다. 중국은 저가 노동력을 기반으로 경제 규모를 세계2위로까지 키웠으니 동아시아 3국이 경제적 성과는 모두 달성한 셈입니다. 이 중 민주주의의 자생적 성취만큼은 유독 한국에서만 가능했고 이에 덧불여 고도로 자율적이고 발랄한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이른바 K 대중문화가 지금 세계 속에 스며들어간 건 어느 이웃 나라도 이뤄내지 못한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모적이고 지엽말단적인 이슈로 사사건건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고 역량과 자원이 낭비되는 양상의, 민주주의(democracy) 아닌 시위 만능의 단절과 분열상, 즉 데모크레이지(demo-crazy)로 타락했다고 김 전 장관은 탄식합니다(p67).
2부 근현대사와의 대화에서는 18인의 국가 원로, 지식인 들이 대담을 나눕니다. 현직 교수 중에는 송호근, 강원택 교수 등이 참여했으며 이종찬, 김종인, 김학준 같은 국가원로들이 조국의 진로를 놓고 열띤 공방을 벌이는 모습이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했습니다. 이분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놓고 "성취와 도착(p158)"으로 요약하는데 도착이라고 할 때 到着이 아니라 倒錯이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가치 전도 현상, 양극화, 인간 소외,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다는 진단이며 대담진은 이를 두고 심각한 우려를 표합니다. 성취는 그것대로 따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가장 심각하게 겪은 상흔은 아무래도 그들이 시도한 민족 말살 정책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p201을 보면 김병익 교수가 "장용학(소설 <요한 시집>) 선생님은 일어로 문장을 써 놓고 우리말로 번역했다고 합니다."라며 회고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고 장 작가님뿐 아니라 저 연배 어르신들 중 상당수가 일어 네이티브이셨으며 언어부터가 저처럼 식민 모국(!)에 의존하시는 판에 의식인들 명확한 독립을 이룬다는 게 실로 난망한 일이었겠습니다. 젊은 세대는 지나친 영어 의존 풍토가 문제일 수 있는데, 다만 MZ 세대 특유의 자립심과 쿨한 마인드가 그런 우려를 불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송민순 전 장관은 본인이 실무자로 근무할 무렵 겪은 일, 즉 1989년 북핵 위기 당시(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남한에서 먼저 영변 선제 폭격론과 독자 핵 무장론이 대두했던 때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회고합니다. 저때에는 미국 대통령이 부시 시니어(=조지 H W 부시)였는데 그의 죽마고우이자 실세, 핵심 엘리트였던 이가 제임스 베이커로서 저 당시 국무장관직을 수행했었습니다(그 직전 레이건 행정부에선 재무장관). 이 사람이 결사적으로, 긴장 고조로 치달을 수 있는 저 움직임을 막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사려 깊은 전략가가 부재하기에 더 위험한 정세이며, 북은 북대로 극한의 브링크맨십을 구사 중입니다. 이만큼이나 많은 것을 이뤄낸 한국이, 경솔한 일부의 불장난이 도화선 노릇을 하여 그 모든 진전을 수포로 돌리고 말까요? 국민 모두의 현명한 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국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