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 20세기 제약 산업과 나치 독일의 은밀한 역사
노르만 올러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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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수의 제약회사들은 일반인이 상상도 못 할 수익을 올리며 이 업계 자체가 진입 장벽이 매우 높습니다. 이 제약회사(이른바 빅파마)들 중 상당수가 독일계인데, 이 책 p18을 보면 향정신성 약물이 제3제국 시절 "날개를 달고 비상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독일은 특히 19세기 중후반부터 세계 최고 수준으로 화학이 발전하긴 하였으나, 그의 가장 섬뜩한 부작용이라 할 만한 이 분야가 유독 나치 집권기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히틀러와 그의 일당이 대중을 선동하고 소수자 집단에 대해 혐오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던 과정은 어찌보면 집단 약물 투여 프로세스와 비슷했습니다. 나치는 시청각 매체의 기술적인 활용과 각종 상징 조작을 통해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집단의 단결과 광신 상태를 고취했는데, 이 과정을 비유적 의미에서 최면, 마취라고 표현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특정 효과를 내는 약물을 투여했다는 뜻은 아니었겠죠.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게도 문자 그대로의 뜻에서도 저 진술이 참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아니나다를까 p33에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세계사적 결정은 어느 정도 열광적 도취의 순간, 경우에 따라서는 히스테리적 상태에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 막힙니다. 세계사적 결정 아니라 무슨 개인사의 사소한 결정도 그런 방법으로 내려져서는 결코 안 되죠. 우리 주변에 보면 술 한 잔 걸치고 뭘 저질러버리는 걸 멋있는 낭만이나 통 큼, 사내다움(나이깨나 먹었다는 여성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으로 포장하는 미친 사람들이 있는데 반드시 그 결과는 파멸적입니다. 

심지어 p31에 보면 "우리는 쉽게 환희에 빠져, 우리는 주사를 놓고 코로 들이마셔!"라는 가사의 대중 가요가 독일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나옵니다. 파쇼 정권이 다른 건 몰라도 기초 질서 확립 등 사회 기강 하나는 확실하게 바로잡았으리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가졌다면, 이 자료 하나로 그런 근거 없는 기대가 바로 무너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을 읽어 보면 안인희 역 한국어판 기준으로 상권에서는 게오르크 슈트라서의 활약이 거의 씬스틸러처럼 나치당 초창기를 수놓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자가 자신의 총통을 찬양하며 늘어놓은 구절이 역시 이 책 p34에 나옵니다. "그는 온몸으로 고행의 길을 걷는다. 술담배를 하지 않았고, 여자도 건드리지 않았다." 히틀러의 생애를 돌아볼 때, 비슷한 시기 혹은 다른 시기에 등장했던 다은 사악한 독재자들과 확실히 대비되는 점은, 그가 금욕적인 면이 분명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배격인 무솔리니도 죽기 전까지 여러 정부들을 곁에 두고 호사로운 생활을 한 것과 대조되죠. 그런데 이 책 저자의 주장처럼, 그가 특히 말년에 만성적인 약물 중독 상태에 놓였다면 이 사실은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어야 마땅합니다. 

이 첵에서 특히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향정신성 약물은 메스암페타민입니다. 우리가 흔히 필x폰, 혹은 예전에 히x뽕 등으로 부르던 것이죠.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독일 제3제국의 가장 빛나는 승리, 전과(戰果)로 여겨지던 폴란드, 이후 프랑스를 각각 상대로 한 전격전에서, 일반 병사들을 상대로 바로 저 약품이나 페르비틴 등을 대거 투약한 채 전쟁이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p84에는 이들 병사들을 가리켜 "튜튼 족의 이지 라이더"라는 표현까지 나옵니다. 잭 니콜슨 주연의 고전을 본 이들이라면 그야말로 내일이란 게 없이 죽음을 향해 폭주하는 허망한 청춘들의 비참한 파멸이 바로 떠오를 것입니다. 

프란츠 할더, 구데리안, 폰 만슈타인, 롬멜(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등 2차 대전 초반 독일의 화려한 전과를 올린 주역들 역시 이 수치스러운 약물 투여 사실을 별반 숨기지도 않고 오히려 그 효능에 대해 뿌듯해하는 어조마저 노출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완전히 망칠 수도 있는 결정을 장군이라는 작자들이 내려놓고 천진난만할 만큼 낙관, 자부하는 꼬락서니라니! 이 쓰레기들은 이념이나 진영을 떠나 그저 군인으로서도 최하 등급을 받아 마땅합니다. 예전부터 모르핀 중독자로 유명했던 무능의 극치 괴링이라든가 생긴 것만 무서울 뿐 그 하는 짓은 궁중의 환관만도 못했던 카이텔 따위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히틀러는 알코올만 빼고 모든 마약을 잘 받아들였다(p241)." 앞서 인용된 슈트라서의 말이 여튼 논리적 오류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아니 더 확실한 도피구가 있는데 구태여 뭐하러 알코올 따위에 의존하겠습니까. p299에는 그 몰락의 날 히틀러유겐트의 동정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그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들이 마치 신처럼 떠받들던 퓌러(지도자. 총통)라는 자의 실상이 이러했다는 걸 진즉에 알았더라면! 일생을 허위, 거짓으로 살아온 무자격자가 청소년 권장 도서를 집필한다는 헛소리만큼이나 우스울 뿐입니다. 

권말에는 전설적 역사학자인 한스 몸젠의 짧은 후기도 있습니다. 이 책 원서 발간이 2015년이며 몸젠의 서거도 동년이라는 점이 깊은 울림으로 제게는 다가왔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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