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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 - 그림의 길을 따라가는 마음의 길
장요세파 지음, 김호석 그림 / 파람북 / 2022년 11월
평점 :
봉쇄수녀원에서 수도 중이신 장요세파 수녀님의 글과 김호석 화백의 그림이 함께한 책입니다.
p23에는 마치 에셔의 작품과도 닮아 보이는, 두 손을 세피아톤의 화폭에 담은 그림이 나옵니다. 제목은 <엄마 손>인데, 한없이 투박하면서도 슬퍼 보입니다. 여인의 손은 한때 비단이 부럽지 않은 섬섬옥수였을 터이나 자녀를 키워 내고 지아비를 먼저 떠나보내고 세상의 온갖 풍파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이처럼 형해화했습니다. 무신경하게 말려올라간 소매는 마치 수갑이나 족쇄처럼도 보입니다. 장요세파 수녀님은 이를 두고 "온전한 소진의 아름다움", "엄마 안에 깃든 하느님"이라 요약합니다. 덧붙일 말이 따로 없을 것 같습니다.
p37에는 고승 송담 스님의 진영이 나옵니다. 김호석 화백은, 이 책 앞날개에도 나오듯이 "한국 불교의 큰스님들, 그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 작업으로 화제를 부른" 예술가입니다. 수녀님뿐 아니라 이 그림을 보는 즉시 우리 평범한 독자들도 떠올릴 법한 의문이, 왜 이 진영이 앞모습 아닌 뒷모습을 담았냐는 거죠. "탈종 후 한 마디 응답도 않은 그 배짱"을 표현할 때 저 단호한 뒷모습 말고 또 어떤 자세가 송담 스님을 더 잘 표현하겠냐는 게 수녀님의 의견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미녀의 얼굴도 성형으로 비슷해져버린 세상(p66)" 어떤 얼빠진 인간은 성형수술이 얼굴의 추함을 얼마든지 은폐할 수 있다고 떠들었지만 사람들의 미감이란 참으로 날카롭기에 어느새 고친 얼굴과 그렇지 않은 자연미를 일일이 분간하고 품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짙은 화장으로 심술의 흔적인 주름을 지워도 잘못 산 자취가 그리 쉽게 가려지지 않습니다. 얼핏 보아 안경만 동동 떠다니는가 했더니 눈도 함께 있습니다. 무섭게도 느껴질 법한데 왠지 정겹고 친근합니다. 수녀님은 저 눈에서 "참으로 중요한 일 앞에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찾고 희망의 불씨를 읽습니다.
토끼는 한국 전통 풍속에서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 정도인데 수녀님은 짓궂게도 플레이보이誌의 그 아이콘을 상기시킵니다. 수녀님들 중에는 유독 등산을 좋아해서 애네들을 산중에서 자주 만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상업적으로 왜곡되고 부당하게 덧씌워진 이미지들을 바로잡고 순화하는 것도 예술가들의 사명 중 하나라고 수녀님은 진중하게 꼬집습니다.
p62에서 "뼈를 녹이는 혀"라는 제목 하에 한없이 타락한 말, 말씀의 일탈을 지적했던 수녀님은 p106에서 "찍어내야 하는 인간 내면의 독사"를 다시 거론합니다. 봉쇄수녀원에 계시다 보니 우리 시민들이 좀처럼 마주칠 일 없는 각종 해수(害獸)를 자주 보시는 듯합니다. 낫으로 저 빠르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생물을 정확하게 찍어내는 건 매우 힘들다는 말씀인데, 심지어 그보다 더 힘든 게 우리 마음 속에 똬리를 친 악마들을 짚어내고 이를 추방하는 일이라고 하시네요. 보일 때마다 찍어내고, 행여 새로운 놈이 새끼를 치지 않도록 평소에 청소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다.
파리, 모기, 바퀴... 벌레들이란 종류도 참 다양할 뿐 아니라 크기도 작고 들여다보면 정말 징그러운 애들이 많습니다. 화백은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벌레를, 하필이면 손바닥과 함께 그렸습니다(p154). 왜일까요? 수녀님은 그 의도를, 약점은 약점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정직한 태도이며 또한 생명의 신비 앞에 겸손해지는 자세라고 추측합니다. 사실 저 그림에는 벌레뿐 아니라 사람의 손도 참 작게 그려졌는데 수녀님은 시력이 엄청 좋으신지 저 손바닥에서 생명선까지 읽어내시네요.
"돼지가죽은 돼지가죽일 뿐입니다(p182)." p189의 그림은 제목이 <펄펄 끓는 슬픔>인데 내용은 사생결단을 하듯 칼을 잡고 일합을 겨루는 두 손을 담았습니다. 이에 대해 수녀님이 내리는 해석이 기가 막힌데 이 글은 정치인들이 귀기울여 읽어 봐야 할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