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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 - 마리아 레사의 진실을 위한 싸움
마리아 레사 지음, 김영선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평점 :
"1983년 8월 21일, 망명한 야당 지도자이자 오랫동안 마르코스(당시 필리핀 대통령)의 경쟁자였던 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 일명 '니노이'가 필리핀으로 돌아왔다(p57)." 그리고 그는 공항에 발을 디딘 후 얼마 되지 않아 총격을 받아 암살당했습니다. 전세계를 당시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은 한국에서도 신문 1면을 장식했는데 아마도 역시 비슷한 처지의 망명객이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의 귀국 때에도 이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그래서 1985년 귀국 당시에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브루스 쿠밍스(Cumings) 교수 등의 유력 인사들이 그와 동행하기도 했죠.
아무튼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저 무렵에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피플파워가 불 같이 일어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1989년 천안문 사태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볼 수도 있고 다만 정말 안타깝게도 중국은 아직까지 참된 의미의 민주주의가 구현되지 않은 상태이긴 합니다. 한국보다 한때나마 앞서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던 필리핀은 저때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정정이 혼란스럽고 두테르테 같은 포퓰리스트가 정권을 잡았는가 하면 2022년 현재 정말 놀랍게도 40년 전의 바로 저 故 마르코스가 현직 대통령 그 사람의 부친입니다. 이러니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간다고 할 수밖에 없고, 이런 필리핀에서 언론 자유가 얼마나 심각하게 도전받는 중일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202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 책 저자이자 언론인인 마리아 레사는 어렸을 때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나옵니다(p35). 어려서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였기에 문화적 차이, 이를테면 파자마 파티 같은 풍습을 처음 접하고 당혹하기도 했다는 말도 나옵니다. 아무튼, 완전한 미국인도 아니었고 필리핀에서만 성장기를 보낸 것도 아닌 이런 그녀의 배경이,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기여를 한 듯 보입니다. "나는 마침내 내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국외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p61)." 이 문장은 우리 독자들이 그녀를 파악하는 확실한 준거틀을 제공해 주기도 하네요.
amok라는 단어는 이 책 p104에 그 유래가 소개되는데 이 대목은 CNN 기자로서 저자가 수하르토 정권이 막 무너질 당시 인도네시아를 취재할 때를 회고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자는 아직 젊었을 때였는데도 세계사 격변의 순간을 용케 잘 접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당시 인도네시아는 오랜 세월 동안 수하르토 치하에서 독재에 찌들다가 경제위기가 터지는 통에 그간 쌓여온 체제 모순이 한꺼번에 노출되어 정권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 경력을 성공적으로 관리하여 2000년 저자는 CNN 동남아지역 간판이 되었다고 나옵니다(p113).
저자는 현재 독립언론사 대표이기도 한데 p160 이하에 신생 뉴스 에이전시 설립자로서 그녀의 새로운 길이 어떻게 개척되었는지가 회고됩니다. 이 대목을 읽어 보면 독립언론이라는 게 그저 대의명분과 의기충천만으로 저절로 길이 개척되는 게 아니고 얼마나 사업 수완이 좋아야 하는지, 세상을 얼마나 잘 읽어야 하는지, 독자들과의 소통, 특히 인터넷 등 뉴미디어를 통한 소통이 얼마나 적실해야 하는지까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초창기 오xxx스 같은 곳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를 천 갈래로 찢어죽이는 정부의 전략(p224)" 2016년 집권에 성공한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허술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대단히 치밀하고 교활한 술책을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었으며 저자를 비롯한 독립 언론 진영은 사실상 부친 마르코스 집권 당시보다 더 힘겨운 도전에 직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 파트에 소개된 갖가지 종류의 언론 와해 공작을 보면, 친중 권위주의 정권은 그들의 본토(?)로부터 한층 효율적이고 반인도적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기상천외한 수법을 잘도 전수받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입니다.
"사냥개를 부르는 휘파람(p244)" 앞에서 저자는 민주주의를 천 갈래로 찢는 독재의 마수를 단죄하는 표현을 쓴 바 있는데 이 표현은 그저 표현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유언론 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책 제9장의 제목은 그래서 "천 개의 상처에서 살아남기"입니다. 역공작, 중상모략, 혐오유발 등으로 어떤 여성은 명예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무대에서 일시 퇴장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그 도덕적 권위에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저자와 그녀의 동지들, 그녀의 회사는 장외에서 법정에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갑니다. 자금 조달에 결정적인 지장을 입어 가면서도 말입니다. "조용히해. 안 그러면 다음은 당신 차례야(p297)." 비겁한 실력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죠.
사실상, 과거의 거대 레거시 미디어, 예를 들면 NYT라든가 WP, TIME, NBC 등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고도 볼 수 있는 소셜미디어, 이를테면 페이스북 등은 과연 공정한 기준으로 각종 이용자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p337에서 저자는 마크 저커버그가 감독위원회 등을 두어 겉으로는 공정성 구현 노력을 기울이는 듯 제스처를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언론 자유에 악당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신랄히 그를 비판합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메타뿐 아니라 알파벳, 트위터 등 다른 거대 IT기업도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p386)"이라는 멋진 말을 남긴 적 있습니다. 그 말의 깊은 의미는 이제 저자 마리아 레사 대표 같은 "행동하는 양심"이 이 척박한 세상에 실천으로 더 분명히 만든다고나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