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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집 김씨 사람을 그리다 - 김병종 그림 산문집
김병종 지음 / 너와숲 / 2022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람, human being을 가리켜 왜 인간(人間), 하필 사이 간(間) 자가 들어간 그 명칭을 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이유가 있긴 하겠습니다. 김병종 교수님의 이 그림 산문집도 세 파트로 이뤄졌는데 각각의 이름은 "시간 사이에 사람이 있다", "풍경 사이에 사람이 있다", "빛과 어둠 사이에 사람이 있다"네요. 사람은 확실히, 혼자 서기가 힘들고 무엇 사이에 있어야만 하나 봅니다. 같은 사람 사이이건 어떤 맥락이나 의미 사이이건 간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p18)은 예나 지금이나, 뭔지도 모르는 고도(Godot)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도가 얼마나 저 두 사람에게 설레는 이름이었는지는 모르나 김병종 교수는 자신의 작품 활동이나 지나온 생에 대해 그 "설렘"이 없었다면 완전한 빈껍데기와도 같았을 것이라며 어떤 영감(靈感), 혹은 열감(熱感)에 대해 술회합니다.
하긴 이런 사정은 석학, 혹은 예술의 대가가 꼭 아니라 우리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사랑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설렜던 마음이라든가 그토록 만나 보고 싶었던 여인과 조우했을 때의 그 두방망이질치던 느낌. 이런 느낌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갖고 가며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이 세상 헛산 게 아니라는 보람으로 남는, 진정 소중한 것들이겠습니다.
앞에 구체적으로 무슨 대학인지를 밝히지 않고 그냥 "대학신문"이라고만 제호를 정해 교내지를 내는 곳은 아마도 서울대학교 한 군데밖에 없지 싶습니다. 저자는 졸업반 때 <겨울 기행>이라는 시(詩)를 써서 해당 신문사의 공모전에 입선했고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헌데 당시 시국이 워낙 그런 시국이다 보니 안기부(현 국정원)에서 지시가 내려와 대폭 개고(改稿)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는군요. 시대의 아픔이라는 건 특히 젊은 지식인에게 각별한 볼륨으로 다가오나 봅니다. <겨울 기행>에 배어나는 소회를 보니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미학자 조르조 아감벤(p111)은 여전히 자주 인용되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굳건한 영향력을 유지합니다. 김병종 저자는 아감벤의 "오리진" 개념을 설명하며 그저 유일성, 창의성 정도의 외연이 아니라, 일종의 근원에 닿으려는 움직임, 또 그 작품 활동이 그 근원에 닿음으로써 성과를 내었냐를 놓고 판단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김 교수님은 이 근원에의 "닿음"이란 뜻을, 나의 과거, 나의 현재 등이 얼마나 긴밀하게 만나는지에까지 확장합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면교사든 뭐든 그 중에 나의 스승이 반드시 있다고도 합니다. 물론 무엇을 배울 최소한의 깜냥이라는 게 있어야 이런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생기는 거겠고요. 여튼 김 교수님은 네팔의 청년 나트구릉, 인도의 짐꾼 하산 등이 (나이에 무관하게) 자신의 스승이라고 토로합니다. 후자는 심지어 직접 만난 적도 없는 TV 프로그램 속의 등장인물인데도 말입니다. 나의 탐욕, 오만, 무지, 거짓을 깨우쳐 주는 거울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 파트에 모두 네 폭의 그림들이 함께 실렸는데 김 교수님 특유의 화풍으로 친숙하게 그려진 작품들이라서 한참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도 되었습니다.
"인생도처유상수". 심지어 스승은 목욕탕 속에도 있습니다. 하긴 김 교수님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이런 청년을 볼 때에도 아마 느끼는 바가 달랐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렇다 저렇다 판단에 판단을 하는 중에 우리의 마음은 지옥에 절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영어에서 judging은 그 자체가 부정적 의미이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도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김 교수님이 p283에서 말하는 epoche가 무엇인지 우리 독자들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 생각과 명상에 그림들도 참 많은 도움이 되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