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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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저술 <우신예찬>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함께 서양 르네상스의 서막을 열어젖힌 계몽주의 사상을 담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며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가르칠 정도로 중요합니다. 

"우신(愚神)"이라 함은, 이 책 p298 이하 역자 해제에 잘 설명된 대로, 어리석음이라는 속성을 상징, 혹은 체화한 추상명사로서의 신입니다. 말하자면 어리석음이라는 부분적 속성을 지닌 신이 아니라(유일신 체계에서 이런 표현을 쓰면 바로 신성모독이겠으며 이런 책은 출판 자체가 블가능했겠습니다), 어리석음 그 자체의 신입니다. 박문재 박사님의 설명처럼, 인도 유럽 어족의 여러 언어들에서는 추상명사들이 매우 자유롭게 신격을 갖춘 채 이야기 속에서 쓰이곤 합니다. 그런데 μωρία는 그리 쓰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바로 이 고전 <우신예찬>에서가 거의 유일한 예?), 구태여 비슷한 걸 들자면 κοάλεμος이겠습니다. 

우신이 과연 누구인지, 신통기 속에서 어떤 항렬을 차지하는지 독자들이 잘 모르는 게 당연하므로 1인칭 주인공인 우신은 p30 이하에서 자기소개를 합니다. 과연 우신이라서인지 늘어놓는 그 자기소개도 바보스럽기 짝이 없으며 일단 객관적 팩트만 추리자면 아빠가 부와 재물의 신 플루토스라는데 여기서 저자 에라스무스는 "헤시오도스가 인정하지 않겠지만..."이라며 한 자락을 깔아 이 서술이 근본 없는 만문(漫文)임을 자인하고 듭니다. 

에라스무스의 이 저작은 사실 특정 정파나 교단에 비판의 초점이 놓인다기보다 거의 "모두까기"식입니다. 이를테면 p60 이하에서 우신, 아니 에라스무스 본인은 여성을 비판하는데 "그들은 아름다운 용모를 앞세워 폭군마저 쥐락펴락하고... 발그스레한 뺨, 사근사근한 목소리, 곱고 부드러운 피부 등을 가져 마치 영원한 소년기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여성들의 '어리석음'이 남자들을 기쁘게하며...그 시답지않은 행동들은..." 운운하는 중 여성과의 무의미한 소통과 환락에다 정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남자들을 비판하며 결과적으로 여성 일반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우신은 이런 여성들의 행태에 전형적으로 깃들며 그 어리석음을 극단으로 치닫게, 혹은 도드라지게 한다는 뜻이죠. 

다만 일방적인 금욕주의 관점에서 일체의 감정 표현을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오히려) 광기에도 바람직한 광기와 그렇지 못한 게 있다"며 은근 역성을 듭니다. 이쯤되면 우신은 비판과 픙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며(책 속에서 원래 주인공이긴 했지만), 도리어 여태 부당히 단죄되어 온 어리석음이 대놓고 주인공의 상석에 오르지 못할 이유가 뭐냐며 항변하는 기조입니다. 

책의 구성은 의외로(?) 치밀하며 바보스러운 어조의 너스레 속에 결국 엄숙주의가 여태 짓눌러 온 온갖 종류의 감정 표현과 자연스러운 행동이 이제 수면 위로 당당히 드러나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도하게 설파합니다. 이 구성이 얼마나 치밀한 의도 속에 실현되었는지는 역자 박문재 박사의 각주만 꼼꼼히 읽어도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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