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 클래식 아고라 1
류성룡 지음, 장준호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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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우지 못한 사람 혹은 민족은 결국 가까운 미래에 또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여 간신히 국체를 보존한 재상이었던 서애 유성룡은 후세에 이를 경계하기 위해 징비록을 썼는데 오늘날까지도 소중한 사료로 여겨져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관심 깊게 연구된다고 하며 화제작인 영화 <한산> 등의 제작 과정에도 아마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으리라 개인적으로 추측합니다.

임란 과정에서 크고작은 공훈을 세운 분은 매우 많으며 우리가 지금 쉽게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도 사실 따지고 보면 마냥 비난할 수 없는 경우도 꽤 됩니다. 이일이나 심지어 신립 같은 이도, 쳐들어온 왜가 워낙 가공할 만한 국가 정규군 전력을 갖추었기에 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뿐 잘 살펴 보면 동정이 가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상급자로서 때로 그들을 따듯이 포용 격려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입니다. 나라의 살림을 맡아 챙긴 재상으로서의 국량과 비전과 통찰이 엿보이는 대목들입니다. 

외적, 혹은 왜적도 문제이지만 이처럼 일단 질서가 한번 흐트러져 공안 문제가 발생하고 보면 내부의 골칫거리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온갖 말썽을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p82를 보면 그런 낌새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초동대처를 서애가 얼마나 기민하게, 또 유효적절하게 해 내는지가 나옵니다. 이몽학의 난 등이 있었으나 임란의 경우 이런 내부 불순분자들의 준동이 상대적으로(특히 중국의 이런저런 왕조 교체기와 비교해 볼 때) 적었던 편이며, 물론 이순신 장군이나 김덕령 장군의 경우처럼 조정의 대단히 부당한 과잉처사가 없지 않았으나 적어도 내부 균열로 체제가 무너지지 않은 건 이런 재상의 노련하고 알뜰한 일처리 솜씨가 큰몫을 했습니다. 심지어 서애는 그 경우에서조차 반대를 했었죠.

왜놈들이 그칠 줄 모르고 진격을 거듭하다 일단 타격을 받은 건 아무래도 명군과 맞닥뜨리고 난 후였습니다. p119에 보면 서애는 왜장 수괴급인 고니시, 소 요시나가라든가, 중 겐소 등이 도망가는 모습을 자못 통쾌한 어조로 회고합니다. 여태 무서운 것 없이 질주하다 처음으로 타격 같은 타격을 받고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찌 아니 시원했겠습니까. 읽는 독자가 다 후련해지지만, 한편으로 이 땅에서 저들 외국 병사들이 저지른 패악을 생각하면 마음이 다시 무거워집니다. 고위급에서 의사 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대체로 아주 큰 마찰 없이 원정군과 단일 대오를 유지한 것도 서애의 공이 큽니다.

이순신 장군의 또하나 빼어난 점은, 전략적 실익이 없고 승산이 떨어지는 전투는 영리하게 기피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가토의 부하 요시라는 간교하게도 우리 조정을 이간시키려 "어찌하여 가토의 상륙을 막지 않았습니까?"라며 이순신의 잘못을 꾸며 내는데, 서애 같은 노련한 경세가는 대번에 속셈을 꿰뚫어보았으나 군주를 비롯 다수는 또다시 이에 농락당합니다. 결국 왜놈들의 농간에 놀아나며 충무공은 국문을 당하고 삭탈관직된 것입니다.

이 기록은 또한 당시 영남에서 손꼽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대도시였던 진주에서의 장렬한 싸움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습니다. 불쾌한 기억은 일단 머리에서 지우고 보려는 당시 흔한 유생들의 이분법적 마인드와는 달리, 고통스러웠던 현실을 철저히 복기하고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그의 꼼꼼하고 집요한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체제에서 선호하는 인물상은 그저 고담준론만을 목청 높여 떠들고 실천가능성도 낮은 절대이상안만을 외치는 타입이었을 텐데 서애 같은 이들은 성(誠)과 경(敬)을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묵믁히 실천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선현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진즉에 백골이 되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든가, 아니면 충직한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살았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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