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 뮤지컬 《순신》, 영화 《한산》 《명량》 《노량》의 감동을 『난중일기』와 함께
이순신 지음, 장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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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한국인이 역사 속에서 겪었던 중 가장 근원적 차원에서의 위기를 부른 국난(國難)이었습니다. 이 침략전에서 우리가 패배했었다면 삼백여 년 후 일제강점기를 새삼 맞을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일본어를 쓰고 일본식 복식을 두르며 일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의식과 정체성 상의 완전한 변형을 강요당했을 뿐 아니라 아예 다른 존재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중이었겠습니다. 우리가 <명량>이나 <한산> 같은 역사극에 여전히 몰입하고 감명 받는 것도, "만약 저 시점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었다면?" 같은 가정에 새삼 모골이 송연해지는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쟁에서 거의 한 사람의 힘으로 전쟁의 향방을 좌우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하기까지 하여, 남은 이들과 그 후손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하고 비장감으로 채우는 인물입니다. 이 충무공의 행적은 타 기록, 심지어 적(敵) 측의 회고 중에서까지 잘 드러나 교차검증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충무공 본인이 남긴 기록까지 감사하게도 오늘에 전하기에 우리는 역사의 디테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록자의 인간적 풍모까지 추론 재구성할 수 있는 풍성한 단서를 만납니다. 

장군은 애초에 우리들 보통 사람들과는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자체가 다른 초인에 가까운 분이시지만, 이 기록을 통해 다시 확인 가능한 사항 중 하나는 날씨, 기후에 대한 그의 유별난 주의력 집중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가 일기(日氣) 변화인데, 그는 거의 모든 일자의 기록에다 날씨의 변화를 꼼꼼히 남기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날 있었던 일을 적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패턴을 구성함으로써 특정 날짜의 일기가 어떤 식일지 예측하는 의도가 넉넉히 있었을 듯합니다. 병력의 양과 정예도, 병참의 충실도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을 조선군이, 그나마 유리하게 활용 가능한 변수가 현지의 자연적 특성에 밝아 최대한 기댈 수 있다는 점인데 장군은 이 점에서 거의 제갈량급의 숙려와 혜안을 지닌 분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정걸에 대해 1592. 8. 24(陰)의 기록에서 영공(令公)이라 칭하는데 책에 주석으로 잘 나오듯 이는 당상관에의 존칭입니다. 영부인, 영식, 영애라고 할 때와 같은 용법이죠. 상식이긴 하나 견내량 같은 지명이 어늘날의 거제군 사등면이라고 역시 주석을 통해 가독성 높게 일러 줍니다. 다만, 거제군은 1990년대 중반 한국 행정구역 체계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편을 거쳐 이제는 거제시가 되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 한국 중부 지방에도 큰 비가 내려 많은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만 9월 13일(음력이므로, 공교롭게도 날짜 역시 비슷하죠)의 기록에서 장군은 역시 폭우에 대한 기록을 남기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술적 측면의 심려원모 일환일 뿐 아니라 다루는 종들의 안전 귀가에 대한 걱정이 짙게 배어납니다. 역시 장군은 천재적 야전사령관에 그친 워머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완성된 군자형 캐릭터, 즉 전인(全人) 신격에 가까운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고조 유방은 자신의 도주에 방해가 된다고 어린 아들을 달리는 마차에서 밀어버린 비정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사람은 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처럼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p17을 보면 심지어 이웃 개(!)를 향한 배려도 나옵니다. 

<난중일기>는 1592년 4월 16일 이 충무공께서 전란의 발발을 감지한 날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니라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기에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정작 4월 16일의 기록도 장황하지 않고 담백합니다. 물론 전란 발생 초기에는 삼포왜란 같은 종래의 난리인 줄 알았을 수도 있으나, 역시 장군의 침착하고 냉철한 성품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5월 1일의 기록에서 수군들의 비분강개함을 따로 칭찬하는 대목이 있는데 당신 자신의 분기탱천함 역시 그들 모두를 합친 것 못지 않았겠건만 구태여 수하들의 분위기를 빌려 우국충정의 분위기를 전하시니 이 역시 대인 군자의 풍모입니다. 

2년 후 갑오년 7. 13의 기록을 보면 셋째 아들 면의 건강을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장군처럼 냉철한 분도 아들의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스스로 점(占)을 쳐 보기도 하는데 물론 당시 사대부들도 주역의 궤를 이용한 점술을 드물지 않게 행하긴 했으나 이충무공 같은 유형으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행태라고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그 서술이 길기까지 합니다(예를 들어 병신년 8월 24일의 기록 같은 건 "맑음"이란 두 글자뿐인데도요). 장군의 애틋한 부성애, 인간적인 측면이 두드러지는 부분입니다. 양력으로 6월인데도 비가 무척 많이 오는 게 또한 특이합니다. 또 원균이 자주 등장하여 충무공과 회동하는데 그의 인품에 대한 가감없는 평가가 눈에 띕니다. 한참 뒤 p336 같은 데서도 아주 직설적으로 평가가 나옵니다. p364에 원균의 "패망"에 대해 언급이 있습니다. 

경(庚)의 어미라고 칭해진 분은 장군의 측실, 즉 첩(妾)인 이른바 부안댁이란 여성인데, 이런 여성의 태몽까지도 일일이 기록하는 자상함을 보입니다. 이뿐 아니라 <난중일기>에는 종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다 적힌 게 특이한데, 신분제 사회에서도 충무공이 그들 하나하나를 인격체로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을미년 12월 13일의 기록엔 石世라는 종이 나오는데 책에서는 이를 "돌쇠"의 음차 표기라고 일러 줍니다. 乭이라는 한국식 한자도 원래 따로 있는데 저렇게 굳이 쓰신 게 눈에 띄긴 합니다(뒤의 p337 같은 데를 보면 注 밑에 乙을 쓴 "줄" 같은 한국식 한자가 인명에 쓰인 예가 나옵니다). 병신년 7월 10일의 기록을 보면 역시 꿈을 두고 점복술을 행하는데 본인의 꿈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꿈도 그 대상으로 삼습니다. 

9월 20일의 기록에 거제 현령이 등장하는데 책에 주석이 나오듯 이분이 안위(安衛)이며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라고 이후 명량에서 장군께 유명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던 바로 그분입니다. 안위의 부족함이 아니라 오히려 장군의 초인적 기량이 드러나는 일화죠. 그만큼이나 명량의 초기 불리함이 두드러졌다는 뜻입니다. 

을미년 2월 3일의 기록을 보면 흥양 배에 불을 던진 혐의를 받던 신덕수라는 이를 심문한 기록이 나오는데 실증(요즘말로는 물증이겠습니다)이 없어 그냥 가두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며 역시 무단히 사람 목숨을 취하지 않는 장군의 신중한 풍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전시 사보타주가 당시에 얼마나 엄격히 처결되었는지를 살피면 더욱 돋보이는 선택이죠. 같은해 4.22의 기록을 보면 무려 남해 현령이 군법을 어겨 효시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이나 우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굽히지 않는 심성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4.24의 기록을 보면 왜측 포로인 망기시로라는 자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 없이 (처형장으로) 죽으러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장군은 그를 두고 "참으로 독종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전쟁 중에서만 입증되는 특정 유형 인간들의 내면 속성이라 하겠습니다. 난중에서도 장군은 각종 제사를 챙기는데 전쟁 발발 전에는 예를 들어 p32 같은 데서 나라 제사를 지내고, p395라든가 p240 같은 데서 부친의 제사에 대해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충무공 같은 분의 행적을 보면 설령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 해도 결국은 어디에선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값있는 생을 채웠을 분입니다. 전쟁 같은 긴급한 일이 있건 없건 간에 그는 매사를 준비하고 다듬고 빈틈을 채우고 완벽을 기하는, 어리석은 범인들이 보기에 이해가 안 될 만큼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고 공무를 수행하는 솔선수범의 화신이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의 모자란 불평불만도 최대한 이해하려 들고 배려하는 마음가짐, 실천을 보면 이런 지도자가 있었기에 정녕 수백 수천의 매국노가 들끓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구나 싶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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