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지방 소도시에 사는 어린 소녀이며, 딱히 형편이 어렵지도 않은데다 아주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양친 밑에서 성장 중이지만 너무도 재미없는 삶을 삽니다. 엄마도 할머니도 아빠도, 지금 다니는 중인 가톨릭 계열에서 운영하는 "국민학교"의 선생님들도 너무 재미없는 분들입니다. 심지어 친구들도 다 재미없고 시시한 애들입니다.

이런 시골에 어느날 애 하나가 전학옵니다. 한눈에 봐도 영혼이 자유롭고(?) 매너가 분방한데 홀어머니 밑에서 큰다고 하는 데다, 그 모친이란 사람은 이 마을에 새로 개업한 다방 마담입니다. 애 스스로 떠들길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과 선생님들은 모두 이들을 꺼리고 경멸하지만 주인공 소녀는 문자 그대로, 이들 뉴페이스 모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도 멋있습니다. 그냥 멋있는 게 아니라 아주 좋아서 죽을 지경입니다. 학교 마치고 나면 그 마담 아줌마가 손님 접대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 보는데 아주 넋을 놓고 구경합니다. 어쩜 저렇게 화장을 예쁘게 했을까? 말투는 또 저렇게 불여우처럼 세련되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저런 엄마 밑에서 컸으니 애도 저렇게 센스 있고 매력적일 밖에.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하지만 주인공 소녀는 이들 모녀 집에 매일같이 놀러가고, 큰 도시에서 온 이 친구가 들려주는 온갖 이야기에 빨려들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얘는 처음에, 주인공이 촌스럽고 어차피 이 마을 사람들이 한통속으로 자기들을 따돌린다고 여겨 퉁명스럽게 대했으나, 주인공이 진심인 걸 알고 다소 어이없지만 찐친으로 지냅니다.

어느날 유랑극단이 이 작은 마을을 찾고, 주인공은 주연 남녀 배우들의 미모에 반해 당일 가출하여 저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굳은 결심도 수포로 돌아간 게, 날짜를 착각하여 극단이 하루 전날 목포라는 엄청 큰 곳으로 전날밤 이동한 줄 몰랐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다방 모녀마저, 어느날 찾아온 아이 아빠(생부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습니다)가 데리고 이사를 갔기 때문에 이제는 이 시골 마을에서 주인공의 꿈(?)과 환상을 키워 줄 벗이나 우상이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특히 사춘기에는 이처럼 어이없는 것에 끌려 자신과 주변의 소중한 걸 깡그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함정은 아무리 영악하고 똑똑한 영혼이라도 피해가기 힘들 듯합니다. 소녀는 커서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충동에 끌려 인생을 망칠 뻔했는지 돌아볼 기회가 있겠으나, 지나고 나면 이 역시 유년 한때의 아름다운 추억일 뿐임도 또한 수긍하게 될 겁니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하고도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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