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날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4
카롤린 라마르슈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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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책 맨처음의 헌사, 제사에도 나오듯 작가가 실제 1995년에 겪은 일로 영감을 받아 창작된 작품들 같습니다.

<트럭 운전사의 이야기>는 남성 화자가 들려 주는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트럭 운전사라고 하면 거친 기질에 둔한 감성, 큼직한 떡대 같은 게 연상되지만 이 화자는 스스로 자신의 체구가 가냘프다고 하며, 또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고속도로에 버려진 개 한 마리 때문에 그는 트럭을 세우고 조치를 취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끔찍한 사고가 "창조될" 뻔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창조되다"라는 어휘의 사용이 적당치는 않은 것 같다고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즉시 수정한 후 대안을 내세우거나 하지는 또 않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에게 지금 아내가 있으며 금발이고 아름답다고도 합니다. 이 말은, 자신과 같은 트럭 운전사, 게다가 풍채가 좋지도 못한 운전사에게는 과분한 아내라는 뜻이며 적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보리라는 점을 잘 안다는 일종의 방어막처럼도 들립니다. 방어막을 미리 치는 사람은 대개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며, 내가 내 약점을 잘 알고 있으니 제발 상처를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호소를 하는 셈도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화자는 자신 주변의 작은 세계에 대해 제법 과감한 해석도 내놓으며, 아마도 이 점을 자각해서인지 "창조한다"는 표현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자주 쓰는 듯합니다.

심지어 그는 도망친 제르멘에 대한 슬픈 회상도 하는데, 이 역시 실재한 일이기나 했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입니다. 그의 부모가 마치 아까 그 고속도로의 개처럼 자신을 버렸다고도 하는데, 이것마저도 그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허구 혹은 보조관념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과연 그는 트럭운전사이긴 할지, 심지어 남성이기나 할까요?(저는 처음부터 이 사람이 여자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하나 확실한 건 그 혹은 그녀가 고속도로의 개 한 마리가 유발, 아니 창조한 엄청난 상실감과 고립감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천사와의 싸움>은 어느 가톨릭 신부의 회고입니다. 제목에 나온 "천사와의 싸움"은 기독교 구약 창세기에서 형 에사오에게 쫓겨난 야곱이 어느날 천사와 한판 겨룬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는 다소 기이한 그 이야기를 레퍼런스합니다. 그 이상한, 그러나 살벌한 대결에서 이기고 난 후 야곱은 주어진 보잘것없는 운명의 질곡에서 벗어나 거대한 종족의 아버지로 거듭나지만, 이 작품의 화자는 성적인 무력 상태에 빠져 수동적으로 사제직을 수행할 뿐인 좌절한 영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화자는 도로에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떠올리며 침울한 기분에 젖어드는데, 그럴수록 집착하게 되는 건 그에게 금단의 열매 그 자체로 다가온 소피라는 여인입니다. 사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도 회화 등에서 뭔가 여성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전통이 있는데 여기서 거세된 남성으로서 사제의 거죽만 쓴 화자 역시 "지혜, 앎(소피)" 앞에 무력해진 장(=요한)이란 세례명이며 또 본인도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 개는 죽어서 분해되었을 것이다." 존재의 무게를 감당못하는 모든 영혼들은 분해, 해체를 갈망합니다. 사실 그는 이스라엘만 되지 못한 게 아니라(이스라엘은 아무나 되는 게 원래부터 아니겠고) 심지어 야곱에도 미치지 못한, 흔해빠진 하나의 장(Jean)이었을 뿐입니다.

<생크림 속에 꽂혀 있는 작은 파라솔>에서 처음으로 여성인 1인칭 화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 역시 도로에서 그 개를 보았으며, 이를 동기 삼아서는 자신의 결별식(남자친구와의)과, 어린시절부터 오랜 동안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상처와 상실감을 길게 뇌까립니다. 모래는 먹을 수도 없고 살에 닿으면 느낌도 불쾌하지만 멀리서 해변에 송송 꽂힌 파라솔을 보면 마치 생크림 케익 표면에 장식된 작은 양초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질은 외관을 통렬히 배신하며, 남은 것은 불쾌한 환멸뿐입니다. "그때 이미 태양은 우물 속에 가라앉고, 검은 물 아래 버려진 개가 있는 것이다." 이 버려진 개란, 그냥 버려지기만 한 게 아니라 죽기까지 했고, 또 불쌍하기만 한 게 아니라 뭔가 절망감 같은 감정마저 유발하는 듯합니다. 

"곡예사의 재주, 철사같이 팽팽한 정신력.." 이런 문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초반에 나오는 아름다운 거미 한 마리의 자태와 동작 파트와 잘 연결됩니다. 사실 거미를 보고 그 기묘하게 진화한 동작과 생태에 대해 미적 황홀감까지 느끼기란(그래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습니다. 남편 니코를 암으로 잃었으나 "젖(p129)"은 끝내 지킨 덕에 사랑하는 안(Anne)을 낳을 수 있었고 행복한(이 단편집에서 드물게 보는) 여성은 결코 "별수없는" 처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가슴 앞에 압도당하고 좌절하여 음경의 기능을 잃은 앞의 저 가톨릭 사제 장(Jean)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원한 휴식>의 주인공 화자 스무 살짜리 안은 아마도 저 여인의 딸 안과 같은 인물일 텐데, 그녀의 얘기 속에서 드디어 왜 저 버려진 개 한 마리가 그토록 애상, 절망을 자아냈는지 비교적 분명히 드러납니다. 살아있을 때, 또 버려지기 전의 개들이란, 얼마나 기운차게 길을 달리고 또 달려들댑니까. 언젠가 그 생명을 다하고 비참하게 길 위에 누운 채 발견되더라도, 이런 아름다운 질주가 한때 생과 육신을 지니고 대지를 활보한 존재의 추억이자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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