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시선 -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
이윤희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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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 서두에서 "왜 훌륭한 미술가는, 여성이 칭송을 듣는 일이 드문가?"라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사회 모든 분야가 남성 중심 아닌 곳이 없었으나, 심지어는 미술 역시 결국은 남성 위주로 돌아갔다는 점은 새삼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래도 여성의 타고난 섬세한 감성이란 게 있어서 미술만큼은 꼭 그러란 법이 없었을 듯한데 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결국 여성이 어느 분야에서도 능력을 못 발휘했다는 건 사회 구조 자체가 억압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1970년대에 들어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p53). 실제로 저자는 책에서, 심지어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유력한 활동을 벌이던 여성 화가들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들이 남긴 작품도 소개합니다. 힘 있는 필치와 작풍을 보고 당시 맹활약하던 몇몇 유명 남성 화가들을 대뜸 떠올릴 만하지만 그런 선입견을 정면으로 배반하듯 저작 명의가 여성들입니다. 이처럼 이 책은 팩트에 기반하여 여성 화가들의 실력과 성취를 독자에게 잘 소개하고, 흥미롭게도 도판까지 곁들이기에 우리 독자들은 자신의 두 눈으로 힘있는 실증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져자는 비제 르브룅의 일화를 소개하며 현재까지도 인기 있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오래된 믿음마저 사실은 남성들이 조작하거나 조장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책을 읽어 보면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주장이라고 해도 어떤 저자가 내세우냐에 따라 그 무게가 다른 듯합니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당대에 문제적 그림이었음은 우리 독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이상적인 나신은 아름답다며 찬양을 받아도, 실제 창녀의 군데군데 망가진 리얼한 누드는 "음란하다"며 비난을 받았다는 게 너무도 아이러닉합니다. 저자는 그 아릅답지 못한 현실 창녀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는 이유 말고도, 마네가 당시 욕을 먹었던 이유는 "그 주제에" 화면 밖(의 남성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대담한 시선에 더 큰 불쾌감을 당시의 (남성) 관객들이 느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미술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그림을 주도적으로 관람하고 비평적 언사를 표현해 온 관객은 남성이었다(p82)." 그래서 그렇게나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 누드가 화폭에 담아지거나 조각으로 표현되었다고 저자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유만으로는 남성 누드 역시 오랜 역사를 두고 즐겨 쓰이던 소재였던 점이 시원하게 해명되지는 않습니다. 


본격적인 서양 문명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았던 곳의 토착민들이 사진을 처음 보고 보인 반응은 카메라로 찍는 행위가 찍히는 이의 영혼을 뺏어간다는 경각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닌 게, 이 책에도 나와 있듯 누군가를 카메라로 찍는 행위는 "공격적, 폭력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생긴 사진작가(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행여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라도 하면, 어떤 여성들은 은근히 포즈(?)를 취하기도 합니다. 여성 사진작가 로리 앤더슨은 길에서 찍은 남성들의 시선 부분을 일부러 지웠는데, 이는 그들의 초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공격적인 시선을 제거하기 위한 미학적 의도라고도 합니다. 이제 남성은 평소처럼 지나가던 여성을 일방적인 욕망이 담긴 시선으로 볼 수 없는데 적어도 앤더슨의 세계 안에서 그는 거세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음, 혹은 성 관련 컨텐츠를 소비하는 자세란 시대를 불문하고 서로 닳았습니다. 역사의 단면을 다룬 상상화도 아니고, 왜 먼 지역의 미개하고 개탄스러운 풍습을 화폭에 담았을까? 저자가 3-3에서 이야기하는 건 성매매, 물론 결혼시장이라는 미명으로 위장하지만 사실은 처참한 인신매매를 다룬 그림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남았냐는 질문입니다. 답은, 당대 파리나 런던에서도 얼마든지 이뤄졌을 인신매매를 화폭에 담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실제 그런 시장에 몸을 담고 매매를 해 봤을 권력, 돈 있는 남성들이 대번에 그림 시장에서 불쾌감을 느꼈으리라는 이유라는 겁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결국 이름난 명화의 창작, 거래 동기 중 상당수는 그저 예술이란 이름으로 윤색되었을 뿐 불측하고 더러운 욕구 충족에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거죠. 


누구의 잘못인가? 에덴 동산에서 축출당한 건 남녀가 똑같이 잘못한 건데도 어느 시대에나 이브가 더 욕을 먹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봐도 잘못은 동등한데 이 역시도 "이브가 더 잘못함"이란 일종의 정답을 어느 세대나 다 강요당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아담과 이브만큼 그림과 조소에서 자주 형상화된 주제도 없고, 이들 중 어떤 그림은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이브 쪽에 자연스럽게 비난이 쏠리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도 분명합니다. 프란츠 폰 스툭의 작품에서는 아예 이브와 뱀이 한몸인 것처럼 묘사된다고 합니다. 악녀로 손꼽히는 역사상의 여걸들이 뱀을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이야기도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죠.


히브리의 여러 설화도 대단히 남성 위주이지만 다른 경우에 비해 여성 의존적 화소도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이 민족이 환란에 처해 있을 때 더 두드러집니다. 유디트는 어떤 색적인 팩터로 유명해진 게 아니라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여걸인데 심지어 이 캐릭터에 대해서도 성적 분위기를 가미하기도 합니다. 젠틸레스키의 유명한 그림은 화가 자신이 여성이다 보니 오히려 예외에 속하며 심지어 남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한 여걸에 대해서조차 몽롱한 분위기를 입혀 성적 대상화하는 전통이 뚜렷한 건 정말 못 말릴 일이다 싶습니다. 


어렸을 때도 참 당혹스러웠던 게 어린이들 보라고 만들어 놓은 명화 도감에도, 아니 여성 누드가 나오는 건 또 그렇다 쳐도 왠 약탈, 납치... 성폭력의 직접 단계만 묘사 안 했다뿐 그 전단계를 소재로 삼은 게 너무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기대라도 해 보라는 듯 여성들은 그림 속에서 절망과 공포와 무력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약탈자인 남성들의 표정은 세상 둘도 없는 쾌락을 맛보기 직전인 듯 자긍심과 득의양양함으로 꽉 차 있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납치 단계에서부터 이미 옷이 벗겨져 있습니다. 이런 묘사가 이뤄진 건 사실 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남성 위주의 시장에서 이런 그림이 고가에 거래가 되었다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게 저자의 솔직한 답입니다. 다만 노골적인 음란물의 혐의를 벗기 위해 인체 묘사의 이상적인 터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성경이나 신화의 맥락을 애써 집어넣었을 뿐이라는 것. "여성에 대한 폭행의 장면이 아름답게 묘사되는 건 정당한 재현 방식인가?(p189)"


안그래도 새로 만들어지는 <백설공주>의 주인공에 히스패닉 여성이 캐스팅되어 화제가 됩니다. 캐리 메이 윔스는 흑인 여성으로서 가장 평온하고 자신에 몰입할 수 있는 순간, 즉 거울을 보는 때마저도 백인 남성들이 심어 놓은 강박관념, 즉 흑인 여성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가상의 폭력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아를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여성 미술가들은 연대의 수단으로 거울을 즐겨 채택하는데 이에는 일정한 맥락이 깃든 것입니다. 대체 왜 타고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떳떳지 못하게 여겨야 하는가? 저자는 이 대목에서 미술을 넘어 사회 체제와 의식 곳곳에 스민 차별과 혐오의 기제를 조명하며 무의식중에 새겨 넣은 세뇌와 기만의 악순환에서 스스로 벗어날 것을 촉구합니다. 


저자는 책의 맨앞에서 나혜석이라든가 프리다 칼로의 경우 예전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 있으며, 요즘 어린이들이 보는 책에 유독 자주 선정되어 다뤄지는 건 그녀들의 작품도 작품이거니와 그들이 살고 간 불꽃 같은 생애의 매력이 더 클 수도 있다고 잠시 언급했습니다(p16). 책 후반부인 p238 이하, 또 p249 이하에서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이 집중 조명됩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그간 인식되어 한국 어느 세대의 교과서에서도 자주 등장했고 칭송되었습니다. 마치 그녀가 남긴 예술 작품들이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증명이라도 하며 또 그런 윤리적(?)인 삶과 분리되는 순간 덩달아 평가절하나 되어야 한다는 듯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 어린 세대에게 소개되는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은 신화 속에서 박제화한 그런 삶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으며, 나이 든 이들이 보면 당혹스러울 만큼, 아니 단죄를 하고 싶을 만큼 분방하고 자유롭게 살다 간 이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 같은 소설가는 당대의 금기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면이 있으나, <롤리타> 같은 건 명백하게 페도필리아입니다. 이 사람이 21세기에 살았다면 오히려 더 큰 비판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소아청소년 상대 성문화는 칼 같이 단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폴란드계 화가 발튀스가 자주 소재로 삼은 "소녀"들을 다각도로 고찰하고 이런 남성 작가들이 즐겨 묘사하는 방식과, 여성 작가들의 시선과 터치를 선명하게 대조시킵니다. 바람직한 건 관음적 요소가 배제된 후자의 선택이라는 결론입니다. 


책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들의 충격적인 표현 방식이 소개되어 독자는 흔들리게 되는데, 이 책 앞표지에 쓰인 말 "훔쳐보지 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겠다."가 떠오릅니다. 확실히, 성적 욕망은 나만 혼자서 상대를 훔쳐본다는 상황 세팅 자체가 흥분을 고조시키며, 그저 대상이고 피사체가 되어야 할 그녀가 프레임 밖으로 나올 듯 나를 대등하게 지켜본다면 산통 다 깨지는 겁니다. 그림을 통해 그간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요해 온 누군가를 동시에 보게 되고,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프레임이 깨지고 나면 그녀뿐 아니라 이제 내가 새롭게 보인다는 점이 놀랍고 흥미롭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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