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여성 철학사
리베카 벅스턴.리사 화이팅 외 지음, 박일귀 옮김 / 탐나는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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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 시절에 도덕, 윤리 과목을 배우며 동서양 역사에 어떤 철학 사조와 철학자들이 있었는지 열심히 배웠지만 그 중 여성 철학자 이름은 어느 하나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공부를 게을리해서라기보다 교과서에 아예 여성 철학자가 소개되지 않았다시피해서인데, 사실 주목, 재조명하려 들면 수천 년 역사 중 여성 한 명이 없을 리 없습니다. 이 책은 그간 우리가 소홀히 봐 온, 위대한 여성 철학자들을 조명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소개한 글들마저 현역 최고의 여성 철학자들이 집필했습니다. 내용이나 형식 양면에서 올스타전 혹은 만신전(판테온)이라 할 만합니다. 


우리 나라 교과서만 그런 게 아니라 영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p7 저자 서문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시몬 드 보부아르 두 명만 등장한다.."며 정평 있는 어느 다이제스트 철학 대중서의 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말이 나오니 말입니다. 뭐 저 정도라면 우리 나라 책들도 안 빼놓고 언급하는 편입니다. 특히 보부아르는 근대 페미니즘의 아득한 조상님과도 같은 사람인데, 몇 년 전 프랑스 총리 마크롱이 공개석상에서 "페미니즘 같은 해로운 풍조가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프랑스의 지적 풍토를 어지럽히고..." 같은 말을 해서 엄청 웃은 적이 있습니다. 마크롱은 유구한 지적 토양을 자랑하는 프랑스 정계에서도 초 엘리트 출신으로 꼽히는 사람인데 저런 무지를 드러내다니... 물론 극성 페미니즘은 1960년대 미국 중심의 우먼 리브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긴 했습니다만.


이 책은 그렇다고 페미니즘 역사에 주제를 한정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보편적인 철학 사조의 유산에 여성들이 기여한 바가 얼마나 큰지를 밝히는 게 주 목적입니다. 물론 그들은 인간인 동시에 여성이었으며 그 빼어난 재능을 동시대 체제가 얼마나 억압했는지에 대해 뼈저린 아픔을 가졌겠으므로 이에 대해 그 저작 속에서 한 마디 안 할 수는 없었겠죠. 책은 중국의 역사가 반소, 그 오빠 반고의 저작 명의로만 보통 소개되는 <한서>의 공동 저자부터 논의를 시작합니다. 


현대 중국은 공산 혁명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여성에 대한 족쇄를 가장 과감하게 걷어내고 부부 사이의 평등을 화끈하게 추구한 나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p37을 보면, 허베이성 전통문화연구소 간부인 딩쉬안이라는 분이 연설한 내용이 일부 인용됩니다. 이분은 바이두 백과에도 다분히 조롱섞인 문구로 소개된 분인데, 이 책에는 안 나옵니다만(이 책뿐 아니라 어디에도 잘 안 나옵니다) 한자로는 丁琁(정선)이라고 씁니다. 21세기에 "처녀성"을 미덕(을 넘어 일종의 "지참금")으로 강조하고 그 외에도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했는데 공산혁명을 했다는 나라에서 저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의 성의식이란 게 이 모양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진보의 기치가 어느 정도나 허상에 가까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후한의 역사가 반소를 첫 타자로 내세웁니다. 인종, 성별, 문화권에의 평등한 비중 할당을 의도한 결과이겠습니다. 우리 나라도 중국고전문화에 정통한 분들이 참 많지만 이상하게도 반고만 강조할 뿐 반소의 기여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건 사서인 <한서>가 아니라 그녀가 쓴 실용윤리서인 <여계>인데, 이 책은 오늘날 여성들이 읽으면 무척 실망스러운 내용입니다. 마치 소혜왕후의 <내훈>을 연상케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숨막힐 듯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이 시아버지, 남편, 시어머니의 등쌀 속에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남을지를 가르치는 일종의 생존 키트로 의의를 부여합니다. 한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유가가 다른 제자백가의 영향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일종의 다원성이 살아 있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며 역시 긍정적 의의를 찾습니다. 또 저 정선, 즉 덩쉬안을 구태여 언급한 건 여전히 구태, 전근대성을 극복 못 한 중국의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과연 누구로부터 지혜를 찾아야할지를 상기하려는 의도였다고 저자가 스스로 밝힙니다. 달리 말하면 중국은 반소의 시대인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발전이 없었다는 뜻도 되겠네요. 


히파티아는 무슨 피타고라스라든가 시인 사포라든가 플라톤처럼 오래된 사람이 아니고, 저 반소보다도 200여년 뒤에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매우 끔찍했고 독립적 여성에 대한 반감도 죽음의 한 원인이 되었기에 이 순교자가 꽤 오래 전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죠.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지만 이미 헬레니즘이 망한지 오래된 시점이었고 어쩌면 이 비참한 죽음이 그리스 고전 문화의 우아함 그 종말을 상징하는 바도 적잖이 있습니다. 여튼 "수학 잘하는 여성"이 멋있는 건 사실이며, 19세기 러시아의 여성 수학자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같은 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히파티아를 소개한 의의는 물론 그녀가 철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당대 수학자들은 상당수가 철학자를 겸했죠. 


여성 사상가 하면 누구나 첫손에 꼽을 만한 인물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입니다만 이 책에서는 그분을 다루기 앞서 메리 애스텔을 소개합니다. 이분은 울스턴크래프트보다 무려 한 세기나 앞서 여성 인권을 테마로 다룬 논문을 썼다고 합니다(p67). 그녀는 귀족 출신은 아니었으나 부친이 석탄 소매업자였으므로 아마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리라 짐작되며 저작들만 남아 있을 뿐 어떤 생을 살았는지, 금욕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았으며 자선에 헌신했다는 정도 외에 더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데, 이 역시 여성에 대한 시대의 홀대를 엿보게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페미니즘 분야 말고 일반 철학의 스탠스에서 이분이 취한 입장은 영국 전통의 경험론과는 반대 지점에 가깝다는 게 이 책의 평가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고교에서 배운 대로, 영국의 경험론 vs. 대륙의 합리론 중 후자, 즉 데카르트의 스탠스와 비슷하다는 거죠. 결혼에 대해서도 그녀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이분에 대한 글은 시몬 웹 박사(물론 여성 철학자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한 글은 산드라 베르제 부교수가 집필했습니다. 


천재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 철학자를 보면 의외로 그 아내, 혹은 애인으로부터 영감을 크게 받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그랬고 존 스튜어트 밀도 그러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여성 철학자, 행동가였던 해리엇 테일러 밀을 보면 성씨가 두 부분입니다. 첫째 남편이 활동가 존 테일러였고 둘째 남편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라서입니다. p101에 보면 존 스튜어트 밀은 저 책의 저작 명의를 놓고 원래 아내에게 특별히 크레딧을 하려 했으나 테일러 밀이 사양했다고 합니다. <자유론> 서문에도 당시 건강이 위중하던 아내에 대한 특별한 헌정사가 있다고 나옵니다. 


우리가 소설가로만 알고 있는 조지 엘리엇(이름도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의도적으로 남성처럼 필명을 썼죠. 반면 저 앞의, 우리 시대 철학자 시몬 웹의 퍼스트네임은 Simone이므로 남성이 아닌 여성형입니다)도 이 책에 따르면 철학자로서의 업적이 크다고 합니다. 그 핵심은 "자기 인식", 즉 나 자신을 아는 일이 궁극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영국 소설은 문학적 성취는 잠시 별론으로 하고, 작품 속에 엄청난 사색과 철학이 녹아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조지 엘리엇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필자 클레어 칼라일 박사는 <미들마치> 등 그녀의 작품 구체적 예를 여럿 들며 자신의 주장을 논증합니다. 책 조금 뒤에는 역시 우리가 소설가로 보통 알고 있는 아이리스 머독이 소개됩니다. 


이어 에디트 슈타인, 즉 독일에서 두번째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며 후설(20세기 초 현상학의 대가, 한국에는 이남인 교수가 이 분야 전공자로 유명하죠)의 수제자였던 분인데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소개됩니다. 또 하이데거의 편협한 태도 역시 날카롭게 꼬집히고 있습니다. 이어 해나 아렌트(이 책의 표기에 따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소개되는데 이 두 분에 대한 글이 분량면에서 다소 짧다는 데서 개인적인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활동가로서 잘 알려진 앤젤라 데이비스가 "철학자"이기까지 한지는 아마 의견이 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 후반부에는 시대상을 반영하여 소위 "유색인종(책에서 그런 표현을 쓰는 건 아닙니다)" 철학자들을 독자들과 만나게 합니다. 특히 책 마지막은 아지자 알히브리라는 다소 낯선, 모슬렘 여성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아직 생존해 계신 교수님을 다루는데 이분은 모슬렘 법과 서양법 사이의 가교를 놓은 업적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혹은 진즉에 알았어야 했을, 여성 철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적어도 PC 면에서 균형을 잘 맞춘 듯 보입니다.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미권에 선정이 다소 치우친 면이 있고, 독자에 따라서는 아직 여성 철학계의 공헌이라는 게 더 진전될 여지가 있구나 같은, 책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페미니즘의 살아 있는 신화인 주디스 버틀러가 이 책에서 다뤄지지 않은 것도 의외라면 의외였습니다. 어렵지 않고 쉽게 쓰였으며, 다만 책을 읽으면서 따로 여러 군데를 찾아 보느라 서평 등록이 다소 늦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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