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끝 소설 르네상스 12
한수산 지음 / 책세상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책프 25기 7주차에 이 작가님의 <아프리카여 안녕>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한수산 작가는 알려진 대로 197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소설가였고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아프리카여 안녕>은 젊은이, 20대 초반 정도, 아직 정신적으로 십대 티를 못 벗은 청춘들의 성장통을 다뤘는데 그 느낌은 시대의 한계가 있어서인지 매우 미숙해 보였다고 그 독후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책은 한수산 작가의 단편집이지만 어떻게 된 게 지금 와서는 단편집 자체로 주목받는다기보다 "<대설부>라는 작품이 실린 책"이란 의의가 더 큽니다. 그만큼, 옛 독서인들한테서도 지금까지 안 잊히는 작품이 바로 <대설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죠. 


지금 이 작품 <대설부>는 한수산 작가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역시 시대가 많이 지났다 보니 그런 느낌을 아주 지울 수는 없으나, 적어도 왜 당시에 이분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상당 부분 해소해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사는 젊은 세대 특유의 감각과 고민, 발랄함이 물씬 묻어나며, 그런 한편 장래에 대한 불안감, 이 젊음이 지나가면 설움을 어찌 달랠까 하는 애상이 잘 풍깁니다. 물론 요즘 MZ 세대는 재테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느라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한수산 작품이 거의 언제나 그렇듯 현실에 대한 감각이 흐릿하며 특유의 이상주의자 같은 기질로 여자가 잘 따르는 타입입니다(요즘 같으면 모쏠 되기 딱 좋은 조건). 이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연극에 심취해 계신 분인데 그야말로 돈안되는 것만 골라가며 몰두한다고나 하겠습니다. 주인공의 본업은 화학공학도이며 교수도 그의 장래를 유망하게 보고 지원도 해 주건만 저모양입니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무척 따르던 형이 주어서입니다.


어느날 주인공은 형의 방을 노크도 없이 찾았다가 <PLAYBOY>로고가 선명히 새겨진 알록달록한 잡지를 보고 있는 형을 당혹스럽게도 목도하게 됩니다. 이지적이고 현명한 줄로만 알았던 형이 그런 저질 매체를 즐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 남자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여자란, 그건 이미 폐물인 법이야."


이처럼 속물적인 면도 있지만 항상 이치에 밝고 자신의 문제를 잘 헤쳐나가던 형, 그가 갑자기 죽고 남은 건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그리고 형이 생전에 사귀던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에 주인공은 베아트리체의 심상을 투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처럼 이는 그저 당사자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주인공에게 형은 뭐랄까, 도스토옙스끼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드미트리와 이반, 첫째 형과 둘째 형을 합쳐 놓은 사람입니다. 큰형은 야성적 충동과 정열을, 작은형은 면도날 하나도 들어갈 틈 없을 견고한 이성의 방벽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


그리고 그 여성은 아마도 주인공이 여성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미덕을 합쳐 놓은... 것처럼 착시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허나 여성은 결국 주인공을 남자로 봐 주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데 이는 당연합니다. 실험실에서부터 그를 졸졸 따르는 후배 여성도 하나 있는데 결국 형의 그 여자가 자신을 보듯, 자신도 그 후배를 끝내 여성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정념을 부르는 여름이 괴롭다면, 청춘은 차라리 만물이 시들고 난 겨울을 기다릴 밖에요. 제목은 그래서 겨울(=눈)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설(待雪)부(賦)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는데, 대학원 여성 후배 역에 박순천씨, 주인공에 길용우씨가 나옵니다. 자신의 뜻을 안 알아주자 두 비커에 염산, 황산을 각각 담고와서 잔뜩 협박한 후 마셔버리는 장면이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런 강산용액이 아니라 탄산음료였다는 게 밝혀집니다. 교수 역에 이호재씨, 죽은 형 역에 당시 한창 주부층에 인기를 끌었다는 박영규씨, 형의 여인 역에 허윤정씨가 나옵니다. 세상 모든 일을 다 통달했다는 양 허풍을 치는 선배 역의 정한헌씨 연기도 볼만합니다. 저 시절 대학생들이란 유치하고 귀여운 맛이 있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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