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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떻게 살래 - 인공지능에 그리는 인간의 무늬 ㅣ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6월
평점 :
코끼리가 육상에서 최강자인 줄은 알지만 범 두 마리를 코로 때려죽였다는 기사는 참 놀라운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강희 연간에 중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어령 박사님이 재인용합니다(p41). 코끼리의 코에 하찮은 쥐 한 마리가 들어가 죽게 할 수 있다는 이야깃거리도 예전부터 전해 오던 것인데 이게 박지원의 책이 최초는 물론 아닙니다. "잠자는 사자"는 메타포가 아니라 실제로 늘 잠자다시피하는 게 숫사자이며 이런 게 호랑이와는 반대되는 기질이라고 박사님은 또 말합니다. 우리 민족도 언제나 새로운 걸 추구하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습성을 지녔으며 이게 아마 "잃어버린 30년" 때문에 고생 중인 일본과 대비시키려는 의도 같습니다(박사님이 언제나 그래왔듯). 그런데 인공지능은 현재 우리보다 일본이 훨씬 투자를 많이 하고 지금 눈에 보이는 성과도 많이 냅니다. 20년 전 IT 분야에 집중 투자하여 성과를 낸 건 대단하지만 일본도 당시의 실수를 아파하는 듯 지금 절치부심하는 중이고, 오히려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건 현재의 한국이 아닐지.
새로운 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박사님의 가르침은 이 책뿐 아니라 여태 다른 책들에서도 익히 봐 오던 것입니다. "10억 4천만이 넘는 인간들의 호주머니 속에서 살던 안드로이드가 드디어 진화하여 알파고의 모습으로 나타난 게다(p25)." 안드로이드의 진화는 인간이나 다른 생체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호흡 같습니다(애플은 소외의 설움을 느낄 만도ㅋ). 박사님뿐 아니라 다른 문화권의 저자들도 "슈퍼컴퓨터를 손에 지니고 다니는 즐거움"을 자주 언급한 적 있습니다. 그만큼이나 대단한 건데 우리들 대부분은 소셜 미디어에 사진 올리는 용도 외에는 쓰질 못하니.. 여튼 박사님 말씀의 요지는 "안드로이드는 좋아했으면서 왜 알파고는 두려워하냐"는 것입니다. 사실 알파고 류의 위력도 6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과장된 면이 많아서 어떤 이유로건 간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그 뛰어난 물건이 자신의 통제 하에 놓이면 재미있어하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 싶으면 꺼려하는 건데 지금 발전 속도를 보면 AI가 그 단계까지 가려면 몇십 년, 아니 한 세기가 지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파고는 알파고가 아니라 알파치라고 불러야 한다(p85)." 이 책에서 박사님은 어린 독자들을 상정하고 대화를 나누듯 말씀을 이어갑니다(p122 등에 나오듯 박사님의 실제 손자).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사실 너희들 어린이들의 엄청난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는 말도 재미있으며(신선 옆에서 시중 드는 삼척 동자를 염두에 둠), 어린이들이 즐겨하는 아타리의 비디오 게임도 언급합니다. "너희들 아빠 엄마한테 물어보면 알겠지만.." 박사님은 이 세대가 어렸을 때 TV에서 아톰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며 성장했다는 사실도 언급합니다. 여기서 박사임은 전쟁놀음인 체스의 두뇌와 신선놀음인 바둑의 두뇌가 서로 다르다는 점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뇌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포석이 안 되고 정석의 모양 인식도 어렵다. 반면 좌뇌에 장애가 있으면 수 싸움이 어렵다" 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박사님은 생전에 이런 기사나 연구 결과는 어디서 접하시는 건지 궁금해지도 했습니다.
"양자역학과 같이 부분과 부분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게 21세기 패러다임 시프트다. 그게 바로 바둑이다. 체스는 IO로 두고, 바둑은 그보다 몇 차원 높은 SQ로 두는 것이다(p110)." 지성을 넘어서 영성을 강조하는 논의는 박사님이 십 년 전에도 책 한 권을 통해 논한 적이 있습니다. "고갯길은 고속도로 같은 직선길로는 절대로 못 넘어간다. 이럴 때 터널을 파는 것도 브레이크스루라고 한다." 확실히 breakthrough는 그저 "돌파"라는 말로는 충분히 번역이 안 되는 다른 뉘앙스가 있습니다. 영문 서적에서 왜 이런 맥락에서 breakthrough 같은 캐주얼한 말을 쓰는지 이해가 잘 안 될 때가 많았는데 이런 관점에서 이해를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일본어로만 바둑[棋]을 '고'라고 부른다지만 이것 역시 기원을 따지면 중국어이다(p121)." 박사님의 지적은 "고"라는 발음 역시 남방계 오어에서 기원했다는 것이고 사실 일어가 한자 관련해서 독자적인 음독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니 당연합니다. 앞에서 말했듯 선 불교도 그렇고 바둑도 일본을 통해서 서양인들이 알게 되었기에 일본 것으로 인식하고, 이렇다 보니 한국 문화 같은 건 일본이나 중국의 주변부로밖에 인식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박사님은 이 점에 대해 예전부터 무척 아파해 왔습니다. 사실 일본은 오어 발음을 그대로 갖다썼을 뿐이지만 우리는 "바둑"이라는 우리말을 만들어내지 않았냐고도 하십니다. 그렇게 보니 과연 그런 것도 같습니다. 이어서 박사님은 태극이라는 도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데 그 심오한 논의에 대해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만 문제는 본문에도 나와 있듯 이것의 출처가 <주역>이며 어차피 중국문화의 유산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럴 때에만 "한국문화, 한국의 혼"이 아니라 "동양 문화"로 얼버무려져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펩시콜라도 우리 나라에 들여온지 오래되었지만 한국인 중 그 로고를 태극과 비슷하다 여긴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이유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객관적으로 보면 비슷하긴 하죠). 한국인이 그것을 보고 아무 동질감을 안 느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박사님은 "존 매카시(과학자)를 들어도 전에는 조셉 매카시가 먼저 떠올랐다"고 하는데 이건 한국 사람으로서 영어를 배우는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존 매카시는 아예 분야가 다른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해도, 유진 매카시는 좀 과장하면 조셉 매카시와 동시대 사람이고 같은 정치인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역사상 뚜렷이 남은 족적만 봐도 조셉과 유진은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길을 걸었죠. 미국인이라면 아일랜드계 성씨인 매카시를 드물지 않게 만나기 때문에 저 존이나 저 유진을 만나서 성이 매카시라고, 혹시 반공투사 아니냐고 놀리는 일 같은 건 아주 유치하고 촌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어쩌다 책에서 만났던 좀 발음이 특이한 성씨가 매카시즘 할 때 매카시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매카시라는 성씨 자체와 매카시즘을 동일시해버리는 겁니다. 유진 매카시 같은, 활동 시기도 근접한 정반대 진보 성향 "유명" 정치인도 있는데 말입니다.
짤막짤막하게 끊어지는 하나하나의 문단들이 완결적인 잠언으로도 읽히고, 이 문단들이 다시 모여서 새로운 의미도 만들어내는, 역시 박사님다운 멋진 글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양자역학 테마가 자주 언급되던데 이 책 자체가 하나의 프랙털 구조(양자역학과 직접은 무관하지만)가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