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유전자 -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대하여
요아힘 바우어 지음, 장윤경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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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고전 <이기적인 유전자>는 많은 독자들에게,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유전자라는 대상에 대해 적어도 어떤 감정이나 인상을 받은 데에 기여했습니다. A, G, T, C라는 무미건조한 성분으로 구성되었을 분인 유전자를 놓고, "이기적"이라는 가치 규정을 한 것부터가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도킨스 같은 석학이 그를 두고 이기적이라고 했으니 여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유전자 아니라 무엇이라고 해도, 번식과 생존, 혹은 진화에의 의지를 가졌다면 그냥 이기적이기만 해서는 목적(그런 걸 혹 가졌다면)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자신(어폐가 있지만)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타자(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공감의 전략이라는 건 이기적 관점에서도 매우 유익합니다.


도킨스의 견해에 따르더라도, 사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건 개체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라 널리 유전자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책의 내용이 반드시 도킨스의 주장과 상충하는 건 아니겠습니다. 그런데 개체가 아닌 유전자 단위에서도 타(他)와 공감하고 협동하며 이타적으로 구는 편이 현명하다는 건 그 고전의 견해와 분명 대조를 이룹니다. 여튼 저자는 도킨스를 콕 짚기보다, 찰스 다윈 이래 이어져 온,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서로 밀어내는 존재(p29)"라는 어떤 믿음, 혹은 인상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하려는 듯합니다. 또 저자는 같은 페이지, 또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도킨스는 유전자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며 따라서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그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고도 명시적으로 주장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책 저자께서 이해한 바대로의 도킨스적 관점이므로, 저자의 이런 이해와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의 게놈은 누군가에 의해 연주되는 피아노와 같다(p32)" 어찌보면 저자가 주제와 연구 대상을 참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멋진 문장입니다. 이 표현은 지금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한 건 아니며, 미주(p241)에 의하면 동 저자의 전작 <몸의 기억> 중에서 이미 시도했다고 합니다. 찾아보니 저 책은 04년에 출간되었고 한국어판은 그 2년 후인 06년에 나왔습니다. 지금 이 멋진 책의 전작 <협력하는 유전자>도 이미 08년에 나왔다고 하니, 22년인 지금에서야 이 책이 우리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게 아쉬운 면마저 있습니다. 도킨스의 책은 벌써 4년 전에 40주년 기념판이 나왔을 정도인데도 말입니다. 사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저 개인적 느낌도, 쌀쌀맞고 투쟁적인 도킨스의 책들보다는 뭔가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책을 고르고 읽음에 있어 그런 "느낌"이 전부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우리 독자들은 어느 한 편에 치우치기보다, 이런 책도 읽어 보고 저런 책도 접해 봐야 견문이 넓어지고 균형 잡힌 생각을 갖게 되겠으니. 


우리는 성격이나, 특히 건강에 관련하여 "나쁜"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여깁니다. 유전자가 좋고 나쁜 게 애초에 있겠습니까만 인간은 제 생존과 행복에 이롭고 그렇지 못한 걸 그 나름의 기준으로 갈라서 볼 권리 정도야 가집니다. 그런데 저자는 심지어 그런 관점에서조차, 나쁜 유전자라는 건 없다고 합니다. 개별 인간의 삶 속에서 유전자는 (말하자면 피아노 연주자 같은 무엇에 의해) 특정 기능을 발현하거나 자제될 수 있겠고, 만약 그렇다면 설령 "나쁜 유전자"라 해도 어느 상황에서는 좋은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저자의 이런 관점은 유전자뿐 아니라 널리 자연과 인생, 사회를 보는 눈을 훨씬 심원하게 틔워 줍니다. 또 유전자 편집 기술이 꽤 발전한 지금 시점에서, 섣불리 우엇을 잘라내고 무엇을 붙여 넣는 선택이 왜 신중해져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정한 영감을 줍니다. "유전자는 소통가이며, 또한 코퍼레이터(협력자)이기도 하다(p34)." 사실 08년 전작의 독일어 원제도 "협력적인 유전자"이긴 합니다. 


과학자가 자기 본래의 연구 분야가 아닌, 예를 들어 "인간성, 인격, 도덕" 같은 주제를 놓고 이를 정의하거나 긴 논변을 펼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책이 그런 책 같습니다. 저자는 유전자를 평생 공부해 왔고 또 세계적인 권위자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연구 결과의 정수 외에 오랜 동안 성찰해 온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심오한 결론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특히 저자는 근래 들어 눈에 띄게 증가하는 정신질환, 마약 중독 등이 인터넷의 발달과 무관치 않다고 지적합니다(인터넷과 인간 사이의 연대에 대해 책 후반부인 p182 이하에서 저자는 자세히 논합니다). 나아가 저자는 인간 소외, 사회적 차별, "좋은 삶", 유전자에 기어이 도달하고 마는 "사회적 경험"까지 이야기합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협력적인 살믜 유익함이, 그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경을 거쳐) 저 깊은 유전자 단위까지 도달하여 영향을 끼치고야 만다는 저자의 "과학적" 주장이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 


공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영화 <스피시즈>를 보면 포레스트 휘태커가 연기한 스미슨 역은 사소한 흔적만으로도 그 흔적을 남긴 사람 혹은 생명체가 어떤 감정 상태였는지 알아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습니다. 책 p105에서는 "타인의 음성언어나 신체언어의 신호가 아주 약할 때에도 직관적으로 공명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런 사람을 두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부른다... 이것은 신경세포의 공명 능력이 얼마나 놀랍고도 중요한지 보여 주는 사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공감능력과 동정심 등은 그저 윤리적이고 추상적이며 감상적인 자질이나 특성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량적으로 계측이 가능한 하나의 연구 대상인 것입니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좋고 나쁜 건 고정된 게 아님"을 지적했었습니다. 마냥 좋을 것만 같은 저런 세포 공명 기능도, 잘못 쓰이면 "비합리적으로 전개되거나 파괴적인 결과(p108)"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악한 자의 선동에 의해 많은 이들의 정의감정이 조작되고 왜곡되는 사례는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죠. 이처럼 저자는 아무리 바람직한 논거가 발견되어도 이것 하나로 폭주하지 않고 엄밀한 논리와 냉철한 시선을 유지하며 책 전체에 걸쳐 일관된 구조를 유지합니다. 책의 최종 결론만 그저 타당하고 유익한 게 아니라 이모저모 다층적으로 독해해도 그 단면마다의 일관성이 모두 유지된다는 게 놀랍습니다. 


"공감적 관계를 맺지 못한 대상은, 인간은 결국 보호하지 않는다(p137)." 그래서 개 등을 먹는 동아시아인을 서유럽인들이 저리 끈덕지게 비판하는 거겠고, 일식에서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조리되는 물고기에 대해 저들이 아무런 거부감(은커녕 열광하며 먹어대죠)을 안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튼 저자는 이로부터 자연에 대한 인간의 건설적이고 동화적이며 기여적인 태도가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도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 결론(자연을 보호하자)이야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바이지만, 이 책은 그 논거를 "공감하는 유전자"로부터 마련한다는 게 흥미롭고, 또 사회적 당위성의 합의와 자연과학적 엄밀성이 이렇게 교차하고 합입할 수 있다는 게 다시 놀랍습니다. 


"인간의 뇌는 주관성과 객관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p159)." 서양인들은 문학작품에서 특히 기억을 중시하는데, 기억은 그저 머리에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주위와 교감하며 열심히 산 흔적과 맥락이며 어찌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과 존엄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치매에 걸린 이들에게 그 최소한의 존엄이 무너졌다며 우리가 그토록 안타깝게 여기고 또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무서워하는 거죠. 달리 말하면 타인과 건강한 관계 맺음을 통해 인지적 건강을 유지 못하는 개인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위중한 상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불건강은 곧 유전자 단위의 병듦과 직결된다는 저자의 대전제와 연결하면 더욱 섬뜩한 결론이 나옵니다. 


복내측 전전두엽피질, 배외측 전전두엽피질, 후방대상 피질, 이 세 가지는 자아 연결망의 세 가지 요소(p209)입니다. 이처럼 과학적으로 세밀히 정의되고 파악된 자아는 심리학에서 일찍이 말한 여러 개념과도 잘 통하며, "무의식의 존재도 부인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 신경망은 자신에 대해서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정신화(p210)"를 시도할 때에도 활성화된다는 게 특히 재미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우리 자아(이미 고립된 내가 아닌)에게 특히 필요한 건 바로 공명(p225)"이라고 저자는 결론을 맺으며, 과학과 윤리가 이처럼 한 지점에서 포옹하며 궁극 최종의 결론이 언제나 하나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감동적입니다. 20세기 독일 가수 마를렌 디트리히의 노래 중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을 위해 태어난 사람(p65)"이란 가사가 포함된 게 있다고 합니다. 이 통속적인 구절이 자연과학의 결론이 될 수도 있다니!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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