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인자의 마음을 읽는 이유 - 모두가 안전한 세상을 위한 권일용의 범죄심리 수업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9
권일용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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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파일러라면 아마 권일용 교수님이겠습니다. 그 성함은 혹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권 교수님의 얼굴은 TV 출연 등을 통해 워낙 알려졌기에 모르는 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프로파일링이란 수사 기법은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널리 소재로 쓰이긴 했으나 이게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선 대중이 반신반의했는데,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악질 강력 범죄자의 검거와 유죄 확증에 요긴히 활용되고 있음을 권 교수님이 (다름 아닌 본인 자신의 빛나는 커리어를 통해) 잘 가르쳐 준 셈입니다. 


p18에 나오듯이 한국인들에게 한때 큰 인기를 끈 드라마가 CSI입니다. 이 미국 드라마를 보면 그저 범인에게 우격다짐을 통해 자백을 받아낼 수 없는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법정에서 통할 만한 증거를 얻어내는지가 실감나게 묘사됩니다. 법치국가에서 가장 피해야 할 일이, "억울한 사람들이 폭력과 고문으로 누명을 쓰는 일(p19)"입니다. 권 교수님 같은 경찰이 있었기에, 흉악한 범죄자는 결국 죄상을 털어놓고, 결백한 시민은 그 무고함이 증명됩니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이들 중 이런 분들이 가장 고마운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권 교수님은 지금도 여러 TV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시는데, 사실 보면서 걱정이 되는 건 이런 프로그램이 우리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건 좋지만, 지능범들이 행여 이를 통해 범행 수법을 배우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 요령을 터득하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권 교수님도 이를 인정합니다. 즉 과학수사 기법이 발전하는 만큼이나 사이코패스 범죄자들도 나날이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면서도 교수님은 "범죄에 '진화'라는 말을 쓰는 게 달갑지는 않지만(p25)"이란 유보적 표현을 쓰면서 그의 정의감을 표출합니다. 


지난세기에 작가 체스터튼은 "범죄자는 창의적인 예술가요 탐정(형사)은 그저 평론가일 뿐"이란 말을 하기도 했죠. 달가운 현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교활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자신의 행적을 감추는 범죄자를 응징하기 위해서는 결코 그들을 가볍게만 볼 게 아니라 가공할 만한 침략군, 적군을 연구하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책 p173에는 선배(?) 정두영의 행적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자신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다는 유영철의 자백이 언급됩니다. 영화 <레드 드래곤>에서 렉터 박사의 재능을 찬양하는 "투스 페어리"의 모습이 결코 픽션 속에서의 행태만이 아니라는 게 증명됩니다.  


강호순 이후로는 아직 연쇄살인범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게 교수님의 말입니다. 없던 유형이 한때 와라락 봇물 터지듯 등장하긴 했으나 권 교수님 같은 뛰어난 경찰들의 활약으로 아마 범의가 움츠러들었을 수도 있고, 기본적으로 워낙 CCTV가 많이 깔린 한국의 환경에서 초범시에 바로 검거되곤 하는 것도 영향이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 정도로나마 치안이 잘 잡힌 나라에 사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겠고 그 큰 몫은 바로 권 교수님 같은 분들에게 크레딧이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범죄자라는 게 저 유영철, 정남규 등처럼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 특수한 성격을 갖게 된 이들뿐 아니라, 사회적 배제감, 상대적 박탈감 등을 품은 그 누구에게로부터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게 권 경감님의 지적입니다. 경감님은 그래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불건전하고 위험한 감정의 표현이, 인터넷 기사나 소셜 미디어에 흔히 달리곤 하는 이른바 "악플"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악플만큼 보편적으로 퍼진 악행이 또 없고, 악플을 습관적으로 다는 이들은 "사실 적시나 의견 표명 정도를 두고 형사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오히려 본인들의 반사회성을 합리화합니다. 이런 한심한 이들 중에는 본인의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두고 오히려 악플이라며 뻔뻔스럽고 반사회적인 역공을 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무고한 사람을 악인으로 몰고서 그 무고함이 드러나자 "악의 평범성" 같은 어구를 경우에 맞지도 않게 들이대는 낙오자, 도피자 유형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아마 그 주변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면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위험한 태도, 감정을 외부에 표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볼 일입니다. 


범죄자들은 때로 비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나도 너희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결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허위에 가득찼는지는 새삼 뭘 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재미있게도 권 교수님은 범죄자와 일정한 라포(rapport)를 형성한 후에는 "같은 상황이었으면 나도 범죄를 저질렀을까?"라며 범죄자와 자신을 잠시 동일시해 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 드라마 <한니발>에서 윌 그레이엄 캐릭터(천재 프로파일러)가 보여 주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악인은 원래 철저히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권 교수님 같은 분은 정반대로 이런 악질들에게도 일정 부분의 공감을 보낼 줄 안다는 게 대조됩니다. 악질들은 본래 다른 이들이 자신을 공감해 주기만을 울부짖을 뿐, 자신이 다른 이에게 공감하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더 강력한 힘을 가졌기에 저항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개처럼 복종하는 건 혹 있습니다만.


촉법소년 문제도 책에서 언급됩니다. 사실 아이들이 흉포해지고 범죄에 물드는 건 사회와 어른들의 책임이 맞고 그 부모들만을 탓할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무력한 원칙론에 불과하며 그저 관용의 눈으로만 대해서는 법제의 허점을 악용하는 이들의 교활함에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 교수님은 "살인과 사기가 경중이 같냐"고 되묻는 이들에게 "어디 한번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보라"고 합니다. 사실 교수님은 현직 때 사기 사건을 많이 다뤄보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공감 능력이 탁월하신 거죠. 여튼 이런 현대적 유형의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한 가지 길은 "눈을 감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 헤아라기"라고 교수님은 말합니다. 거의 종교적 경지입니다. 


보성 어부 사건은 당시 모든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가슴 좀 만져 보려고 했는데 거부한 그O이 잘못한 거다.""애초에 배를 태워달라고 한 것들이 잘못이다"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강력 범죄 수사 과정을 회상화며 권 교수님은 그들의 비틀어진 심리를 하나하나 짚습니다. 문장은 침착하고 논리적이지만 그 행간에는 의분이 느껴집니다. 포모 증후군이라든가 인터넷으로 촘촘히 연결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범죄자를 덜 닮게 되고, 또 어떻게 해야 사회 파괴적인 강력 범죄를 선제적으로 방지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저자는 차분한 논의를 이어가며 독자의 공감을 유도합니다. 조선 시대 고매한 유학자의 향촌 교화 논변을 듣는 느낌도 듭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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