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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풍차
최인호 / 여백(여백미디어)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책프 24기 48주차에 같은 작가의 <처세술 개론>을 읽고 리뷰를 썼었습니다. 지금 이 작품은 그 소설과는 또 사뭇 분위기가 다른데 원래 최인호 작가가 엄청 다작을 한 분이고 어느 특정 스타일, 소재, 주제에 머문 사람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어느 특정 작품과의 관계를 말한다는 게 사실상 무의미하기는 합니다.
주인공은 법적 혼인 관계가 아니라 어느 재산가의 "첩"한테서 태어난 소위 사생아입니다. 요즘 같으면 직계혈족임이 증명되기만 하면(증명도 쉽죠) 재산 상속에 아무 문제가 없으나(사실상으로는 유족들의 실력 행사 등으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소위 적모(適母)의 후의가 있어야 이런저런 일들이 그나마 편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히 여겨지는 것들이, 1980년대 즈음에는 완강한 가부장적 사고에 막혀 현실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겠습니다. 이런 걸 보면 1990년에 가족법 개정을 이뤄낸 전문가들은 정말 대단한, 시대를 앞서간 업적을 많은 난관을 딛고 이뤄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족법의 실질적인 현대화는 저 1990년에 대부분이 완수되었고, 21세기 들어 이뤄진 호주제 폐지 등은 형해화한 찌꺼기 몇을 치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적모의 제안으로, 또 생모의 승낙을 받아 생부의 집에서 기거하게 됩니다. 이 집안은 적모가 모든 일을 주관하며 여기서 주인공이 맡아 해야 할 일은 배다른 남동생을 돌보는 것입니다. 애초에 아들이 버젓한 처지이면 구태여 사생아를 집에 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즉 이 이복동생은 정신적으로 다소 박약한 구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자주 눈에 띄는 자폐라든가 조현병 같은 건 아니고, 약간의 자폐 증상을 보이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타인과 소통은 가능합니다. 단지 무엇인가에의 집착이 강하고, 낯선 사람과 쉽게 말을 섞지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능이 크게 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고, 이 이복형과 친해지며 소통이 이뤄지고 나서는 형을 따라 뭘 막 열심히 몰두하기도 합니다. 마음을 완전히 열어야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는 듯하며, 마음을 여는 게 힘들기 때문에 TV나 공교육기관의 선생, 책 등을 통해서는 학습이 어렵다는 것 같습니다.
어느 문학 작품에서건 서자는 기본 인성이 비틀어진 캐릭터로 세팅되기가 쉽고 여기서도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불량배에 가깝습니다. 나쁜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런 것만 보고 배웠다는 식인데, 좀 독특한 건 겉으로 드러난 것이나 하는 짓은 논쟁의 여지 없는 불량배이지만 마음에 은근 착한 구석이 있다는 겁니다. 나한테서 뭘 기대했냐?라고나 하듯 주인공은 이복동생에게 절도, 재물손괴, 음주 흡연 등 못된 건 다 가르칩니다. 문제는 이 동생이 갑자기 만난 형을 무척 좋아하기에 아무 마음에 갈등없이 시키는 대로 다 따라한다는 겁니다. 그 모친은 아직 이런 한심한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가뜩이나 사생아는 미움을 받기 마련인데 이런 사정을 알게 되면...
재미있는 건 작가가 이 작품을 명백한 성장 소설로 기획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장은 주인공의 몫이며 나보다 못한 누군가의 (의도된) 좌절, 실패를 보며 주인공은 오히려 자신의 타락한 심성, 모자란 부분 등을 자각하고 이를 고치려 든다는 것입니다. 의도는 이복동생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구원되는 길을 발견합니다.
이 작품은 1980년대에 MBC에서 역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으며 주인공이 이복동생과 공유(!)하려 드는 여친 역을 한창 젊은 시절의 황신혜씨가 맡았습니다. 아, 그 경이로운 미모를 구경하느라 정작 드라마 진행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