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20여편의 작품, 그리고 그 외 이 작가분이 쓴 다양한 장르의 글들이 수록되었습니다. 그 중 제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박(朴)서방"입니다.
"서방"이라는 단어는 현대에는 결혼 한 시동생을 가리킬 때라든가(공교롭게도 "도련님"이라는 제목의 다른 작품도 이 책에 수록되었습니다), 장인 장모 입장에서 사위를 부를 때 쓰이는 정도지만 대체로는 나이가 젊은 축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작품집에서 보듯, 1970~80년대 정도에는 거의 늙은이에 가까운 사람을 두고서도, 아무 친족 관계가 아닌데도 그저 기혼 남성이기만 하면 쓰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경우 다소의 하대가 될 수 있으므로(역시 작품 중에 나옵니다) 용법이 조심스럽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박서방은 수도권 어느 허름한 주거지에서 이런저런 서민 가구들과 함께 마치 시골 공동체에서처럼 소박하고 허물없는 소통을 주고받으며 사는 한 집안의 가장입니다. 아들도 있고 딸도 둘 있는데 둘 다 나이가 차서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 다니는 관리직과 좋은 사이이며 사윗감도 그 직장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입니다. 다른 하나가 문제인데, 동네에서 그저 기술자로 일하는 남자(자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와 교제하는 중이며 이 남자가 전과가 있다는 게 마음에 영 걸립니다.
박서방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처신이 주책맞고 경박합니다. 물론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이런 처세상의 가벼움 때문에 동네에서 (그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서방"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둘째 예비 사위도 뒤에서 "박서방"이라 부르다가 약혼녀에게 타박을 받기도 합니다. 한번은 크게 술에 취해 귀가하다 하수도에서 넘어져 크게 다칠 뻔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첫째 사윗감의 도움을 받아 친해지게 됩니다. 본인에게는 좀 과분한 사윗감에도 불구하고 워낙 성격이 괴팍하고 눈은 한없이 높아서 여튼 살갑게 대해 주지를 않습니다.
25기 13주차에 서영은의 <뱁새의 꿈>을 리뷰했는데 거기서는 딸이 자신의 집안을 부끄럽게 여겨 어느 집을 빌려 상견례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 이 "박서방"에서는 그렇지는 않고, 첫째 사윗감의 출신이 (아마도) 엄청 격이 높은 집안이다 보니 시내의 아주 그럴싸한 뷔페 레스토랑(시대상을 감안해야 하겠습니다)까지 상견례를 하는 장면이 있고 이 장면이 작품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사윗감은 조실부모한 탓에 그 고모가 나오는데 여기서 박서방이 너무 무식한 티를 내서 상대가 크게 당황합니다. 박서방의 주책도 문제지만, 오히려 무례한 쪽은 고모입니다. "댁의 따님은 우리 집안의 격에 맞지를 않으니 다른 상대를 찾아보려 합니다." 설령 바깥사돈이 문제였다고 해도 그 딸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여튼 박서방은 자신이 딸의 장래를 망쳤다는 자책감 때문에 기가 팍 죽어 지냅니다. 이런 사람은 한번 충격을 먹어야 자기 객관화가 되죠. 한편 그 고모 되는 사람도 조카에게 설득을 당했는지 질책을 받았는지 나중에 박서방을 찾아와서 사과를 합니다(그래서 결국 둘은 맺어진다는 겁니다). 그 고모가 잘못한 것도 맞고 또 뭐 극의 갈등은 그런 식으로 해소되어야 청취자의 마음도 후련해지겠으나 어째 좀 급작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진행입니다. 하긴, 한국 사람들은 필요도 없이 과잉반응하다 나중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수습하는 통에 더 큰 대가를 치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오히려 이런 게 리얼리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 "박서방"은 KBS에서 영상물로도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주책맞은 타이틀 롤은 신구씨, 아들 역에 장용씨, 큰딸에 이경표씨, 작은딸에 김현주(SBS <토지>에서 서희 역, 혹은 "국물이 끝내줘요"cf에 나온 그 배우 말고 더 선배 배우. 발성이 아주 좋은 분이죠)씨, 첫째 사윗감에 연규진씨(한가인의 시아버지), 둘째 사윗감에 임병기씨 등 유명한 연기자들이 다수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