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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효석 - 분녀 ㅣ 9의예술 한국문학전집 417
이효석 / 9의예술 / 2021년 10월
평점 :
25기 9주차에 방영웅의 <분례기>를 리뷰했었습니다. 지금 이 소설과 좀 비슷한 분위기이긴 하며 시대상도 아마 근접했겠으나, 제목에 쓰인 "분"이라는 한자가 서로 다릅니다. 그 소설에서는 대변이라는 糞이며, 이효석의 이 작품에서는 화장한다는 粉입니다.
그 소설이나 이 작품이나 비운의 여성이 운명의 장난감이 되어 비참한 신세가 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주인공 여성이 그런 부조리한 운명에 의해 좌우되면서 은근 타락을 즐기는 듯한 면이 부각된다는 게 다릅니다. <분례기>에서는 끝까지 주인공이 저항을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혼자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힘 앞에 처참히 짜부러지는 과정을 다뤘었습니다.
여기서의 분녀는 이름 그대로, 자신을 희롱하려는 남자들의 위력과 얕은 수작에 박자를 맞추면서 자존을 전혀 지킬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하긴 이런 식으로 살면서 딴에는 자신이 남자들을 갖고 놀고 있다며 황당한 자기기만에 빠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떤 물질적 대가를 받고서, 몸이나 마음이 끌리지도 않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게 과연 최소한의 존엄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길일까요?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마치 하디의 피조물 테스에게처럼 동정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소설에서의 분녀는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할 길을 찾으며 이 고달픈 싸움에서 그저 목숨만 유지해도 자신이 승자가 된다고 여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분녀는 내심 좋은 카드를 거머쥔 듯 야릇한 쾌재를 올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은 1980년대 KBS TV 문학관에서 극화된 적이 있는데, 여기서의 분녀는 소설 원작의 주인공과는 매우 다릅니다. 극에서의 분녀는 다소 촐랑거리기는 해도 원치 않는 남자한테 함부로 몸을 맡길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다만 생활력이 강하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매사에 적극적이라는 죄(?)뿐입니다. 또 그녀가 뒤집어쓴 나쁜 평판은 전적으로 질이 아주 나쁜 동네 아낙들에게 그 죄를 돌려야 마땅합니다. 드라마의 결말에서 분녀는 구슬프게 울며 노모의 유골을 강에 뿌리는데 이런 건 원작에서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원작의 분녀는 거의 적극적인 탕녀이니 말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소설 원작에도 "왕가"라는 중국인 캐릭터가 나오며 늦은 나이에 혼자 산다는 점 말고는 조선 땅의 음욕 가득한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효석이 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킨 건, 주인공이 "심지어 중국인한테도 몸을 준다"는 그 헤픈 습성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뿐입니다. 그러나 TV극에서는, 등장하는 남자들 중 저 왕서방이 가장 선량한 사람이며(생김새 때문에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줄 오해했습니다만), 미개하고 사악하기 이를데없는 동네 사람들한테 일방적으로 억울한 피해를 입은 희생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역시 원작의 설정 중에는 없으며, 드라마에서 구태여 이렇게 중국인에게 깊은 동정을 보낼 수 있는 설정을 넣은 건 아마 박정희 정권 당시 진행되었던 화교 탄압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흔적이 아닐지 그냥 제 마음대로 추측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