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만큼 먼 나라 지만지 한국희곡선집
노경식 지음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3년은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생중계 방송을 실시하여 눈물겨운 상봉을 드라마처럼 실현시키는 이벤트가 있었던 해입니다. 한국은 1945년 38도선 분단, 1953년 휴전선 획정, 그 사이의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전란 때문에 가족들, 부모형제나 부부 사이에 생이별을 겪는 큰 계기를 맞습니다. 요즘 같으면 국가 행정력이 잘 구비되고 전산망의 도움이라든가 DNA 검사 등의 혜택을 입을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이런 걸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꼭 한국전 당시가 아니라 해도 우연한 사고, 경제적 궁핍 등으로 혈연과 헤어지는 일이 요즘보다는 훨씬 자주 일어날 만했습니다. 


주인공들은 노부부인데 원래 38선 이북에 거주하던 이들이 월남하면서 헤어지게 되고, 남편은 아들, 딸과 함께 살다가 새 부인을 맞이하게 되고 딸은 어린 나이에 죽습니다. 아들은 장성하여 결혼하고 남매 둘까지 슬하에 두는데 이들을 키운 사람은 영감님의 후처였으며 이분도 병으로 일찍 죽습니다. 아들과 손자, 손녀는 "낳아주신 (얼굴 모를) 어머니(할머니)"와 "길러 주신 어머니(할머니)"를 구분하며 성장했고, 영감님의 후처가 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기에 정서적 애착은 친모(친조모) 못지 않게 형성된 상태입니다. 영감님의 후처가 된 분도 초혼은 아니었는데 후사를 못 본다고 해서 시가로부터 소박을 맞은 분을 영감님이 맞이한 것입니다. 영감님과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없었던 걸 보면 불임의 원인은 여성 쪽에 있긴 했나 봅니다. 당시는 시대가 시대였으니만치 이런 걸 두고 여성에게 큰 흠을 잡았겠음은 우리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이런 것이 봉건적인 몹쓸 폐습, 인습임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이 당연합니다. 


한편 영감님과 젊어서 생이별을 하게 되었던 부인은 어느 재산가와 연을 맺게 되었는데 이 재산가와의 사이에서 새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봅니다. 재산가에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는데 같은 직장을 다니면서 부인을 알게 되고 남동생에게 소개하면서 두 사람이 맺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잘사는 집안을 일궜으나 젊었을 때는 고생을 많이 했으며 특히 그 남동생은 일자무식 적수공권에서 건축업으로 일어선 자수성가형 인물이었습니다. 건축업자는 현재 고인이 된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건축업자)이었다면 (성정이 거칠어서) 임자한테 막대하지는 않았던가?" "전혀 아니었고, 아주 착한 사람이었어요."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목표를 달성하려면 짧은 시간 동안 규격화한 패널을 들고 방송에 비춰지기라도 해야 요행을 바랄 수 있었지만 정말 운 좋게도 영감님과 그 부인은 방송을 거치지도 않고 상봉하게 됩니다. 여의도 인근 공원에서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못다 나눈 회포를 풉니다. 허나 각자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 


영감님의 아들은 당연히 두 사람의 소생이지만, 영감님의 부인이 건축업자와의 사이에서 본 아들은 당연하게도 영감님과 아무 혈연 관계가 없습니다. 영감님의 아들과 건축업자의 아들은 말하자면 이부형제인 셈인데, 이복 형제라고 해도 사이가 좋으라는 법이 없었고 하물며 여전히 여성의 재가가 금기시되던 당시라면 특히 건축업자 아들 입장에서 모친의 전남편과 그의 소생이 자신의 모친을 만나는 게 반가울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일군 지금, 자신의 모친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가문의 명예에 큰 흠이라도 잡히지 않을지 꺼려지기만 합니다. 


게다가 영감님의 아들은 작은 회사에 다니는, 그리 넉넉지 못한 형편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건축업자 아들 입장에서는 이런 종류의 이산가족 상봉이 반갑기는커녕 악몽으로 다가옵니다. 영감님의 아들은 처음에 이부 동생의 이런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처신에 격분했으나, 차차 그의 입장을 이해하게도 됩니다. 영감님 입장에서는 삼십 년 전 부부의 연을 맺고 슬하에 자녀까지 보았다가 전란으로 생이별을 한 아내의 행방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껏 만나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감동의 이벤트로만 인식되던, 수십 년 만에 만나게 된 이산가족 상봉 그 이면에 이런 말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음을 날카롭게 묘파한 작품이며, 속물 근성 가득한 건축업자 아들의 반응이라지만 어느새 독자들까지도 씁쓸한 긍정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솜씨가 탁월합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주관한 KBS에서 이를 극화한 게 또 특이하며, 영감님과 그 부인 역에 이낙훈씨와 반효정씨, 아들 역에 전무송씨, 건축업자 아들 역에 민욱씨 등이 나와서 실감나는 연기를 펼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