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전상국 지음 / 세계사 / 198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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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88년에 발표된, 중견 작가(그 당시에도) 전상국씨의 중편소설이며 당시 작가의 경향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게, 길이상으로도 일단 중편이며 주제도 현실고발풍으로 묵직합니다. 윤정모의 장편 <고삐>가 약간 떠오르기도 하는 진행입니다. 씨의 기존 작품들이 보편적인 세팅을 깔고 무색무취의 세태 풍자를 기해 온 것과 달리 이 중편은 한국사의 특정 국면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정면으로 현실 고발에 나선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을 정면으로 받고 새로운 작풍을 시도한 듯도 보입니다. 


여주인공은 빈곤과 여성 차별이라는 이중의 시대 모순에 시달리는, 다소의 전형성을 갖춘 캐릭터입니다. 간호 장교 출신이라면 여타의 기지촌 여성과 처지가 달라 보이는 듯도 하지만 월남전 당시 현지 파견 간호장교라면 지금 우리가 떠올리곤 하는 해당 직종의 상황과는 크게 달랐나 봅니다.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은 고달픈 현실에 대한 일종의 출구로 그 길을 택했다는 듯 암시됩니다. 


여기서 그녀는 미군 백인 군의관을 만나 깊은 정분을 쌓습니다만 본인의 과실이 다소 개입하여 밀수품을 다루게 되어 치안당국의 조사를 받습니다. 억울한 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구태여 그런 일이 엮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게, 장교 신분으로 경솔했다는 비판을 들을 소지가 많아 보입니다(독자인 제게는). 이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를 맺어 온 백인 군의관은 갑자기 본국으로 소환되는데, 그렇다고 마음이 떠났다든가 하는 사정은 (독자가 걱정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전혀 아닙니다. 


이별 통고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저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약점을 잡고 당국에 고발한다는 등 협박을 받고 질 나쁜 흑인 병사 등에게 성폭행을 당하여(윤간 상황이었습니다) 급기야 흑인 아기를 출산하게 됩니다. 사실 작가의 작중 포인트도 은근 여기 있습니다만 이 여성은 불행과 고난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초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물론 성폭횅을 가한 놈들이 나쁜 건 당연합니다만 이 상황은 구태여 그 단계까지 가기 전에 방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조금 힘든 고비가 다가오면 이 여성은 선제(?) 자폭을 해 버리는 이상한 선택을 합니다.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설령 당국에 신고하는 과감한(쉽지는 않았겠지만)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않더라 해도, 거주지를 옮기거나 최소한의 자기 방어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녀는 마치 이웃 기지촌 여성과 똑같은, 수시로 성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자포자기 신세로 스스로를 떨어뜨립니다. 이 단계에서 (약간의 불안감이 있었겠으나) 그 군의관에게 절연당한 처지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뭔 이유인지 이런 선택을 하고 난 후에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공개리에 모욕을 당하는 등 아예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혀 버립니다. 


이 다음이 더 놀라운데 본국에 송환된 군의관은 아예 초청장을 보내어 정식으로 혼인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합니다. 정말 놀라운 건 이 사람이 주인공의 흑인 영아 출산 사실도 알고 있고, 주인공이 도미를 한사코 거절하자 취학연령에 도달한(그래서 한국 현지 학교에서 몹쓸 짓을 당하기도 한) 그 사생아만이라도 미국으로 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내 외할머니가 흑백 혼혈이라서, 나한테서 흑인 자녀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매한 인격적 처신을 보인 덕분에 아이는 미국으로 건너가 잘 성장합니다. 그러나 편지도 곧잘 쓰고 나중에 한국을 재방문하기까지 한 그녀는 생모에게 매몰차게 대합니다. 이 대목을 읽는 독자들은 딸의 저런 태도에 이상하게도 분개하거나 비판할 마음을 품지 않게 됩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생모의 비합리적인 자기 파괴 행태, 한 술 더 떠 이를 대물림까지 하려는 이상 심리 기제를 꾸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생아가 딸이라는 점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작가는 (당시 기준) 한국 여성들의 무의식 속에 유전되는 체념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 자체를 고발하려는 의도이며(누가 봐도 분명합니다), 이는 비단 이 작가뿐 아니라 이규태 같은 관찰자들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습니다. 원초적 가해자야 물론 당대의 야만적인 남성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체제였겠습니다만, 정말로 대를 이어 내려온 듯한 이 이상심리와 적대감, 얼마든지 당대에서 끊어버릴 수 있었던 피해의식이나 르상티망 등이 이제 궤를 달리 틀어 새로운 국면의 성 대결 양상으로 발전한 게 아닌지 우려되는 면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기지촌 학교에서 별난 동정심으로 사생아를 보호해 온 교사가 현지 토호와 대립하다 치안 당국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공개 분신 자살을 하는 등 비극적인 에피소드가 매우 풍성하여 작가의 기존 스타일과는 몹시도 차별됩니다. 이 작품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제작, 방영도 되었는데(1989) 주인공 역에 놀랍게도 윤여정씨가 나옵니다. 작년(2021) 이분의 수상에 대해 뭔가 마뜩지 않은 듯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행여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지금 이 대목에 시선이 이르기라도 한다면 미 영화아카데미의 깊은 배려에 경의를 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해당 단체의 선택에 그렇게나 깊은 뜻이 있었다고는 뭐 전혀 생각되지 않습니다만(이 작품을 누가 알아서).  


사족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성취, 절절한 서사와는 별개로, 제목이 과연 작품 내용에 적실하게 붙었는지는 개인적으로 약간 의문입니다. 뻐꾸기의 그러한 습성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작품 중에도 설명이 나오기까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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