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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 「임철우」 - 사평역, 눈이 오면, 붉은 방 ㅣ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20
임철우 지음, 권일경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7월
평점 :
한자로 모래 사라고 할 때는 두 가지 글자가 있는데 하나는 물 수변의 沙이며 다른 하나는 돌 석변의 砂입니다. 두 글자 다 윈도에서 지원하며 뜻도 (여러 개 중에) "모래"가 첫머리에 옵니다. 9호선 고터역 다음에 소재한 곳은 후자를 쓰며, 전라남도 화순군 소재의 한 면에 붙은 이름에는 전자를 씁니다(평은 平으로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배경으로 삼은 곳은 물론 전남 화순군 사평면입니다. 서울의 해당 지역에는 이 소설 창작 당시 전철역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고, 소설에는 먼 남도의 향토색이 물씬 배어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인심 좋은 역장님인데, 늦은 밤 이곳을 지나치는 열차를 기다리는 객들은 추운 겨울 날씨에 벌벌 떨며 각자의 애잔한 사연을 속으로 삭이거나 조용히 이웃과 공유합니다.
사평역이라는 곳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는 (개인적으로) 모르겠습니다. 다만 버스 노선이나 기타 대중 교통 인프라가 완비되지도 않았고 개인 소유 차량이 많지도 않았을 과거에는 삼등얼차가 지방 곳곳을 다녔겠고, 이 소설 중에서 자주 나오는 묘사대로 "급행열차(보통은 새마을호)를 먼저 보내는 이유로" 지방의 작은 역에 열차가 자주 서는 건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 소설 중에는 사평역뿐 아니라, 인접한 학구역, 또 임촌역이 언급되는데 이들 모두 실존했었으므로 아마 철도역으로서의 사평역도 거의 틀림 없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독특한 건 이 소설 중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가 길게 인용된다는 점입니다. 아마 해당 시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임철우 소설가가 창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이 배경이다 보니 역사 안에서도 객들은 벌벌 떨며 고작 톱밥으로 온기를 뿜는 난로 곁에 모여 고생들을 하는데, 역사 구석에는 어떤 여인이 굽은 자세로 잠을 자는 중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추운 곳에서 사람이 잠을 잘 수 있다니..."
대학교를 다니다가 현실에 절망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아우슈비츠를 탄식하는" 이상주의자 청년도 있고, 집에는 화장품 회사를 다닌다고 속였지만 사실은 술집에서 몸을 파는 젊은 여인도 있으며, 가게에서 돈을 훔쳐 도망친 동생을 잡으러 이 먼 곳까지 내려온 뚱뚱한 서울 사모님도 있습니다. 그녀는 마치 주변 사람들과는 자신이 완전히 다른 부류라도 된다는 양 거만한 분위기지만, 그런 표현이 효과를 내기까지 들여야 하는 노력이 꽤나 버거워 보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과 삶의 무게에 치인 통에, 옆의 대단하신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려 드는지에 신경 쓸 여유마저도 없습니다.
각자의 애달픈 사연이 독자에게 하나씩 소화되고 나서 드디어 기다리던 기차가 역에 도달합니다. 기차에 올라타면 당장의 추위도 면하고, 또 이 차를 막상 놓쳤을 시 그들이 겪어야 하는 불편과 손해 따위는 일단 피하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내리고 난 후 이들의 인생 길목에서 기다리는 또다른 장애와 과제는 여전한 무게로 남아 있겠으며, 이들이 그런 지점을 어떻게 맞을지는 자신들을 포함해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오로지 세월의 진행을 한 자리에서 오래 지켜 본, 마치 역사 건물만큼이나 늙은 역장만큼은 어떤 그림이 그려진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띱니다.
이 책에는 1988년 임철우 작가가 한승원씨의 <해변의 길손>과 이상문학상을 공동으로 받았던 <붉은 방>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책프 25기 11주차 리뷰에서 이 작품 "사평역"에 대해 짧게 언급한 적 있고, 24기 36주차 리뷰에서도 임철우 작가를 거론한 적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