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죽음과 그 후의 기억 - <현고기(玄皐記)> 번역과 주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 자료총서 21
김용흠 외 역주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 이름이 "현고기"라고 되어 있다면 참 그 뜻을 새기기가 어렵습니다. 皐라는 글자는 언덕, 논, 두드리다, 부르다의 뜻이 있는데, 그게 사도세자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지금 이 책에는 그 뜻을, 현(玄)은 임(壬)과 통하며, 고(皐)는 오(午)와 통하기 때문에 임오년의 화변을 소상히 기록했다고 설명합니다. 혜경궁 홍씨는 부군의 죽음을 가리켜 "그 망극한 일"이라 둘러 말했는데, <현고기>의 저자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입에만 올려도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정치적 오해를 받기 십상인 그해의 간지를 저런 식으로 돌려 말한 듯합니다. 


사도세자는 정통성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비록 후궁 소생이긴 하나 궁정의 온갖 축복을 받고 자라났으므로(혹은, 그렇게 드라마 등에 묘사되므로) 적장자가 아닐까 착각하는 수가 있지만 아닙니다. 심지어 효장세자라고 어렸을 때 죽은 형도 하나 있었습니다. 


경종은 생각보다 강단 있는 군주여서 (21기 30주차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노론 4대신을 한 번에 척결할 만큼 엄청난 정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추세가 조금만 더 갔더라면 노론이 오히려 소수정파로 추락했겠지요. 후세 사람들이 착각하는 대로 경종이 소론의 꼭두각시이고 영조는 노론과 결탁한 독재자라는 식의 단순 구도였다면 저 무렵(신임년)에 바로 소론이 대세가 되었겠죠. 또, 이인좌의 난 이후 소론을 모두 쓸어버리고 영조가 노론만을 유일 정파로 자리매김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역사가 어디 그리 흘러갔습니까. 


여튼 이른바 "신임의리"를 둘러싸고 영조가 친 노론 행보를 보인 건 사실이고 이에 대해 사도세자는 반대정파의 편을 든 것 같아 보입니다. 일종의 권력 투쟁이 일어난 셈인데 신봉승의 <한중록> 드라마를 보면 약간 전-노의 알력을 극중에 은유한 듯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 드라마가 아니라 이보다 세 시즌 앞선 <회천문>이 그렇다고도 하는데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시대상황을 잘 이해 못했거나 드라마를 보지 않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임의리가 내내 회자된 건 그만큼 신임년의 대숙청이 충격적 사건이어서이겠고,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로는 "임오의리"가 또 논란이 되었습니다. 허나 정조는 조부 영조보다 더 영리한 통치자였고, 그래서 어느 특정 정파에 유리하게끔 정사를 휘둘려 돌보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개혁 군주였고 완강한 기득권 세력인 노론의 음모에 결국 휘말려 희생되었으며 이후 노론(중에서도 벽파)이 다시 독주하다 나라가 망했다는 식의 논리는 어처구니없는 역사 왜곡입니다. 실상은 영조, 정조 두 개성 강한 군주를 거치며 붕당정치가 (그 순기능이든 역기능이든) 실종되었고, 이후 영민한 군주의 수완을 대체할 만한 시스템의 부재 때문에 세도 정치가 들어섰다고 보는 게 정상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