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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TV 드라마선집 - 제7집
편집부 / 제삼기획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모두 열세 편의 시나리오가 담겨 있습니다. 1980~90년대 드라마, TV 단막극 등에서 많이 만났을 법한 작가분들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이환경 선생은 이미 1980년대에 주로 KBS에서 인기 높은 드라마를 여러 편 집필한 유명 작가였으나 이 책이 나올 시점에는 그의 커리어를 통틀어 대표작이라 할 만한 <용의 눈물>이 아직 방영되지 않았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양인자씨의 <동그라미>였습니다. 양인자씨는 부군인 작곡가 김희갑씨와 함께 여러 히트곡을 만들어낸 작사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때 한국 화단의 미래를 이끌어가리라 기대를 받았던 주인공은 딸 하나를 남기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폐인이 되다시피합니다. 그는 명동의 번화가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팔아 간신히 연명하는 노점상 신세인데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와 길에서 재우는 등 여간 딱한 모습이 아닙니다. 한편 명동 거리에 위치한 회사에 다니는 배은숙은 어느날 자신의 얼굴이 담긴 작은 그림을 건네주는 어린이(화가의 딸)을 만나 엄청 친한 사이가 됩니다. 이십대 중반인 그녀에게 지나치는 모든 어린이들이 예뻐 보일 만도 하지만 이 아이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유별난 데마저 있습니다.
생각보다 그림 장사가 잘되는 편이었는지 어느날 화가는 구매자와 거래를 하느라 장시간 자리를 비우고, 이 사정을 몰랐던 미스 배는 혹시 빵집에다 자신의 딸을 맡기고 이 사람이 도망이라도 간 게 아닌가 의심하여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파출소로 향합니다. 이 행동의 의미가 뭔지 눈치빠르게 깨달은 아이는 크게 상심하고, 늦은 시각에 아이를 찾으러 온 화가를 만나고서는 자신의 오해에 대해 크게 부끄러워합니다. "키울 수 없는 아이를 잠시 맡기는 척하고 빵을 사 주는 척하며 도망가는 부모"는 일종의 저 시대(1980년대) 클리셰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렇게 가정해야만 미스 배의 다소 튀는 행동이 21세기의 독자에게 디소의 개연성을 가지게 되죠.
아이는 갈수록 미스배에게 집착하며 이에 큰 부담을 느낀 화가는 동두천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러나 오히려 미스배가 화가의 친구를 통해 연락처까지 알아내어 기어이 동두천까지 찾아옵니다. 당시만 해도 이십대 중반은 여성에게 결혼적령기였던 터라 집에서는 모친, 남동생(재수생)까지 나서 결혼하라고 성화인데, 미스배는 직장 동료에게 "신세 망친다"는 타박까지 받아가며 애까지 딸린 열 살 연상의 유부남한테 꽂혔습니다.
"이 그림의 여자와 누나는 많이 달라. 그림의 여자는 이목구비가 느슨한데 누나는 단단하고 분명한 얼굴이거든."
이게 그림을 처음 본 시점에서의 남동생이 내린 평가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그림 속의 여자는 부처님이 따로 없네. 이 그림은 누나가 일생을 두고 최종적으로 도착해야 할 지점의 얼굴인가봐." 라고 바뀝니다. 내서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 시나리오 작품의 제목이 "동그라미"인 이유는, 미스 배가 동두천의 화가 집을 찾아가서 최후 통첩과도 같은 고백, 청혼을 한 후 아이에게 하는 말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동그라미를 만들어서 아빠가 영원히 못 나오게 하자."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영혼에게 각진 우리라면 오히려 탈출을 재촉하는 역효과를 부릅니다. 이 화가가 마음을 잡고 그 천부의 재능을 잘 발휘하려면 딸과 (새) 아내의 지극한 사랑이 필요한가 봅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 MBC에서 1988년에 베스트셀러 극장의 한 에피소드로 극화가 된 적 있습니다. 화가 역은 <무인시대>에서 괴승 두두을 역을 멋지게 소화한 전무송씨, 미스 배 역은 박순천씨, 화가의 코믹한 친구 역은 젊은 나이에 아깝게 타계한 손창호 씨, 미스 배의 어머니 역에 김소원씨 등이 나와 멋진 드라마를 잘 빚어내었습니다. <수사반장>의 여경 역으로 유명한 노경주씨의 젊었을 적 미모도 좋은 볼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