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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우주를 건너는 너에게 - 수학자 김민형 교수가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김민형 지음, 황근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월
평점 :
"직접 멋진 답을 찾아보렴." 우리가 선현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고 과거의 지식을 배우는 것도 뜻깊은 활동이지만, 문제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 답을 스스로 찾아나서는 것도 멋있는 모습입니다. 동화 <피터 팬>의 결말부에 "젖은 미소"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 뜻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지금 이 책은 저자 김민형 교수님이 그 아들 오신 군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벌써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나 개정한 내용이라고 하는군요. 그래서인지 IBM에서 만든 인공지능 컴퓨터 "딥 블루"에 대한 언급도 있고 여러 모로 시대상이 반영된 대목이 있습니다.

여튼 저자는 여기서 "목적 없이 유식하기만 한 것, 뛰어난 성능으로 계산을 해 내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지 아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반문합니다. 저자는 영국에 체류하면서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포스터스 박사의...>의 연극판을 관람(p39)합니다. 물론 다 아는 대로 이 작품은 한참 뒤 괴테가 극시로 확대 창작한 <파우스트>의 원전이기도 하죠. 이 이야기에서 포스터스 박사, 혹은 파우스트는 대체 왜 악마한테 영혼을 팔았을까? 결국 그가 얻어낸 건 하찮은 잔재주일 뿐 아닌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근본이 되는 지혜, 삶의 궁극의 비의에는 여전히 눈이 먼 채, 국소적인 디테일 몇을 알았다고 그것이 거대한 성취가 못 됨을 제발 잊지 말고 살자는 취지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디테일을 모르고 기초도 채 마련되지 못한 거대담론의 허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결국 삶의 개별 진실을 판판이 놓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오류임은 마찬가지입니다. 의사이기도 했던 예전 말레이시아의 총리 마하티르는 "과학은 어떻게만 가르쳐 주지, 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대답이 낡아빠진(때로 해롭기까지 한) 종교 담론에서 낱낱이 찾아지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p67에서 저자는 <포스터스 박사> 이야기를 다시 꺼냅니다. 연극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자꾸 꺼내는 건 독자인 제 생각에는, 지금 수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첨단에서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과 대화하며 업적을 공유하는 저자이지만, 문득 그 모든 디테일에 대한 천착이 다 무슨 소용인가, 어떤 지적인 성장이 과연 영혼의 성장과 비례하는가(p47)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떨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아드님에게 말합니다. "때로는 시 읽는 기쁨을 느껴 보렴."
"모든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기독교의 구약에 나오는 거인 골리앗을 위시로 한 블레셋(필리스틴) 사람들은, 실제로는 "집을 잃어버린 미케네 인, 트로이 원정 등으로 주인이 집을 비운 새에 탈출한 도리아의 노예 등이 패를 이뤄 떠돌다 가나안에 들어온(p29)"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정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 즉 일견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는 그리스 설화와 유대인들의 전설이 절묘한 교차점을 찾는 이 사연이 너무도 매혹적이지 않냐고 합니다. 아마 저자는, 일견 모두 파편화되어 아무 연관점이 없어 보이는 수학 각 분야의 지식, 혹은 물리학 각 분야의 지식들이 언젠가는 거대한 합일점을 찾아 하나의 맥락에서 그 모든 의문들을 풀어 주는 날이 오지 않겠냐는 어떤 기대를 갖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닐까요?
p121에는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가 논의되는데 저자는 그의 광범위한 사상 중 "공장에서 부품으로 노예처럼 노동하기보다 전원에서 사는 삶이 더 낫다"는 대목을 꺼냅니다. p122에 나온 그의 그림 세 점 중 첫번째 것은 폴 데이비스의 <God and new...>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죠(구판). 윌리엄 블레이크는 토머스 해리스가 쓴 스릴러 장편 <레드 드래곤>에서 핵심 테마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많은 고뇌를 갖고 산 사람의 작품은 그 고뇌의 흔적이 작품에 그대로 배어 있기에 후세 사람들에게도 끝없는 생각의 소재를 던져 주기도 하죠. 천주교에서 첫째로 꼽는 "교사" 바울로와, 신교의 토대를 놓은 마르틴 루터에 대한 (균형 잡힌) 언급도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최대 수수께끼는 큰 대상의 이론을 어떻게 하면 작은 대상의 이론과 정확히 접목할 것이냐 하는 거야. 다시 말하면 중력이 어떻게 양자역학과 접목되어서 양자중력 이론을 만들어내는지를 이해하고 싶은 거지(p163)." 그러게 말입니다. 양자역학의 역설은 현재 많은 이들에 의해, 그저 역설만은 아님이 점점 밝혀지고 있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정작 완강한 신비에 싸인 영역은 중력이겠죠. 접목은 고사하고 중력 자체의 본질도 명쾌히 해명이 못 되었으니 말입니다. 수학적 매개 이론이 먼저 밝혀지고 그 신비를 말로 풀어내는 과정이 이후에 이어질까요, 아니면 말로 먼저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고 그 다음에 수학적 정당화가 따라갈까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수 속에 깃든 오묘한 조화를 음표로도 표현할 수 있는 쇼팽 같은 천재의 작품도 같이 사랑하게 되나 봅니다. 야상곡에 대한 별난 애정을 숨기지 못하고 스페인 마요르카에 남은 그의 흔적을 거론하자 독일인들이 그런 사연도 있나며 신기해하는 모습을 들려 줍니다. 한국에서는 마요르카 하면 바로 쇼팽을 떠올릴 정도(p177)인데도 정작 유럽인들이 이를 모르다니... 예전에 배철수씨가 미국에 가서 왕년의 컨트리 락 밴드 CCR을 거론하자 "그게 누구요?"라며 되묻던 미국인들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배철수씨한테는 거의 신앙의 대상과도 같은데 본토에서 정작 인지도가 낮다니 말입니다. 동남아의 한류 팬이 한국까지 와서 어떤 젊은이에게 1970년대 산울림을 묻자 어리둥절해하는 격이라고나 할지.
가곡이라고 해도 어떤 연주자가 부르냐에 따라 느낌은 사뭇 달라집니다. p245에는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CD가 언급되는데 아마 CD라는 매체가 갓 나와 세계의 음악팬들을 처음 찾을 무렵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CD의 세상은 사실 십 년 남짓 지속되었을 뿐이고 1999년에 이미 mp3 포맷이 나오는 통에 기대보다 오래가지를 못했지요. 슈베르트의 가곡 <인 뎀 프륄링>에서 어떤 느낌이 나는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학창 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큰 소리로 부르던 여러 명곡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 좋고 벅찬 느낌을 자신의 분신인 아들과 고스란히 나누고 싶은 부정(父情), 우리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