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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지음, 허진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월
평점 :
"완벽한 멕시코 딸"은 과연 어떤 뜻일까요? 사실 많은 이민자들의 정신과 자긍심을 짓누르는 강박은, "왜 나는 완벽한 미국인이 아닐까? 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라는 핵심 정체성에서 왜 이리 나는 멀리 떨어진걸까?" 같은 것이겠습니다. 흑인이나 라티노들은 벌써 외양에서부터 백인 주류 사회에서 선호하는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말투, 취향, 신념, 종교 등 설령 그 중 몇이 주류에 부합한다 해도 메인스트림에서는 벌써 낌새를 채고 그들을 멀리하기 일쑤입니다. 이러니 설령 자신의 출신으로 복귀한다 해도 위화감이 들고, 그렇다고 주류에 헌신하자니 그런 충성을 달가이 여기지도 않고, 이민자 출신으로는 영원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완벽한 멕시코 딸"은 솔직히 (적어도 처음에는) 고민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고민이 된다면 "왜 나는 완벽한 미합중국의 딸이 아닐까?"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민자의 딸은 처음의 순진한 기대를 버려 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과 나(혹은 나의 가족, 나의 출신, 동족) 사이에는 현격한 갭이,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이민자의 딸은 고민합니다. "왜 나는 완벽한 멕시코 깔이 아닐까?" 애초부터 올바른 고민은 이런 방향을 가졌어야 맞았습니다.
"나는 바네사가 딸 올리비아에게 으깬 콩을 먹이는 걸 본다. 열여섯밖에 안 되었으나 벌써 딸이 있다.(p95)" 이 한 문장은 참으로 많은 것을 함축합니다. 콩(bean)은 본디 라티노들이 주식으로 삼다시피하는 오랜 작물입니다. 마치 한국인이 김치를 먹거나, 흑인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미국에서는) 수박인 것과 비슷합니다. 콩을 먹으며 성장했고 이제 그 딸에게 콩을 먹이는 바네사, 누가 뭐래도 (완벽까지는 모르겠으나) 멕시코의 딸이 분명합니다.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 콩을 가까이하겠습니까. 그리고 잘사는 미국에서 이민자 특유의 소외를 겪는 그들이기에 기어이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기릅니다. 이런 결핍과 고난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아니면 그보다 훨씬 오랜 세대로부터, 대물림된 것입니다. 이민자, 가난이라는 굴레 외에 바네사는 여성이라는 족쇄까지 함께 차고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화상 흉터가 있는 어느 여성은 행인들에게 구걸을 합니다. 버스에는 오줌 냄새가 나는 어떤 남자가 앉은 자리에서 인사를 건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여튼 미소로 답한다(p59)." 묘한 구절입니다. 세속화할 대로 세속화한 미국 사회에서 더 이상 상류층은 기독교 신앙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이민자들이 고유 문화를 지키는 맥락 속에 구교 신앙을 이어가는 편입니다. 이런 그룹에 속하는 그녀조차도, 자신이 세상의 주재자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기에 그처럼이나 괴로운 삶을 살아내는 중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저 냉소의 보조관념으로 쓰일 뿐입니다.
멕시코인들은 멕시코인만의 입맛, 풍취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가 나초나 부리또를 경멸하듯 표현할 때 그처럼 한목소리를 내어 항의했던 것입니다. p270 이하에는 정말로 많은, 멕시코를 상징하는 음식이나 토착적인 표현(다른 스페인어권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색채, 이런 냄새를 물씬 뒤집어써야 "완벽한 멕시코의 딸"이겠다 싶을 만큼. 그러나 알고보니 완벽한 미국인이 되기보다 훨씬 어려운 숙제가 바로 "완벽한 멕시코인 되기"였습니다. 미국스러움을 일방적으로 해바라기하다 어느 순간 환멸과 현타가 온 주변인 그 누구에게도 이 소설은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