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 - 광복 이후 근대적 도시에서 현대적 대도시로 급변하는 서울의 풍경 표석 시리즈 3
전국역사지도사모임 지음 / 유씨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박인환은 모더니즘 스타일리스트로 유명하며 대표작이 <목마와 숙녀>입니다. 시인 김수영은 이에 대해 호된 비판을 가했는데 이 책 p39에 그 독설이 그대로 인용됩니다. 오늘날에도 그 쿨하고 선명한 심상이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는데도 말입니다. 이 책 중 "종로길" 파트를 쓴 손은희 씨나 저 독설을 당시에 퍼부었던 김수영 시인이나, 해당 작품을 평가절하한 소치는 아닐 것입니다. "사기(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는 모양이다(p37)." 그 진의는, <마리서사> 같은 멋진 작품을 함께 읽어야 박인환의 천재성이 제대로, 균형 있게 이해되리라는 충심에 가깝습니다. 요즘 종로 하면 뭔가 잘 안 씻고 부시시하게 외출한 퇴물 기생 같은 느낌만 풍긴다고 여겼는데 이 책 이 파트를 읽고 나서 다시 찾으면 완전히 달리 보일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참 예쁘고 멋집니다. 저는 중고등학생 때 사회과 부도에서 서울이라는 도시가 20세기 후반 동안 어떻게 확장했는지(1990년대 이후로는 서울 행정 구역 개편이 안 이뤄졌으니) 보여 주는 지도를 봐 왔었는데, 이 책 pp.10~11에는 구한말, 일제 강점기(10년 단위로 세분된), 해방 이후에 서울이 각각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보여 주는 세밀한 지도가 나옵니다. 아, 그랬던가 하는 감탄이라든가, 이처럼 세심하게 과정을 보여 주는 편집상의 성의에 대해 뭔가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 제목이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인데, 이 책 자체가 어찌 보면 "휴대용(?)" 표석입니다. 물론 진짜 표석들을 담은 컬러 사진도 엄청 많이 실려 있습니다. 


미인대회(pageant)는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어느 도시, 국가에서도 오히려 그 현대화의 상징처럼 여겨져 성황리에 개최되곤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 미스 유니버스가 개최되기도 했죠. 하지만 여성 단체 등에서 성의 상품화라며 많은 비판을 가하기도 했고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에 이릅니다. 책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강선애 필자가 쓴 "명동길" 중에서 하종순 원장의 미용실이 명동에 소재했음을 알려 주는 대목(p55)이 있어서입니다. 여튼 지난시절 명동이 멋쟁이들의 거리로 손꼽히던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용산에는 위수 감옥이 있었는데 계엄령, 위수령 할 때의 그 단어입니다. 이 감옥에 백범을 암살했던 안두희가 한때 갇혔다고 하는데 백범은 1949년에 변을 당했으므로 이미 대한민국이 출범한 후였습니다. 책에는 한국전으로 잔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결국 소령으로 예편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많은 이들의 분노를 부르는 대목이죠. 미군은 해방 이후 이 땅에 진주하여 일단 철수했다가 한국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당시였지만 수도 일각에서 세계 첨단 유행의 한 자락이 모습을 (어설프게나마) 드러내기도 한 건 이런 배경이 있어서였습니다. 이런저런 오래된 호텔들이 강북 곳곳에 아직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습니다. 


개발 이후 여의도는 내내 한국에서 손에 꼽는 금싸라기 땅이었으며 지가의 부침도 없이 이처럼 내내 그 레벨을 유지하는 것도 경이롭습니다. 이는 그만큼 한국 안에서 아직 성장과 발전의 에너지, 창의성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저자의 규정은 "한국의 맨해튼(p106)입니다. 반면 영등포에는 물론 비싼 아파트 단지도 많지만 편차가 꽤 크며 전망도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재 강남을 영동이라 부르는 예는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으나 애초에 영동이라는 말이 영등포의 동쪽이었다는 유래를 고려하면 이 일대의 과거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동(永東)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 책 p116, 또 저 뒤 p250에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마포에서 포(浦)라는 글자라든가, "마포종점"이라는 유행가 제목만 봐도 이 지역의 과거 수운으로서 중요한 비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때 침체를 겪었고 야세가 강한 선거구로도 유명했으며 오랜 시절 동안 야당(주로 민주당 계열) 당사가 이곳에 위치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도 손 모, 정 모 등 강성향 정치인들이 주로 당선되죠. 책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한 지점으로서의 위상도 강조합니다만 사실 그런 구실이라면 여기 말고도 고려, 거론되어야 할 곳이 많겠습니다. 요즘은 아파트 값이 많이 올라서 더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에는 양화진이 한성시계 밖이었기에 적군이 수도까지 진격했다는 느낌은 덜 받았겠습니다만 현재는 양화대교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엄연한 서울 시내이며 한때는 부촌 인상도 주곤 한 동네입니다. 동대문 일대는 구한말 가장 먼저 전철이 부설되고 운행된 곳이지만 현재는 위상이 많이 다르며 다만 큰 환승역이 소재하긴 했습니다. 요즘은 트램 재건설도 일부 지방 도시에서 논의되는데 여기도 혹시 어찌될지 모르죠. p163에는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만든 전철안내도가 소개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류와는 체제가 많이 다릅니다. 


구한말부터 이 땅에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큰 봉사를 하고 많은 혜택을 주고 가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는 선교사 부부의 아들이었는데 한국(1922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고 이후 미국으로 간 후(사유는 일본의 추방입니다) 한국전이 터지자 "조국이기도 한(그 자신의 표현입니다)" 이곳으로 돌아와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대에 걸쳐 은혜를 이 땅에 끼친 셈인데 이렇게 고귀한 영혼들이 피를 흘려 지킨 이 땅에서 나는 과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끄럽기도 하고 한없이 죄송해지는 마음이 듭니다. 


책 후반부는 강남, 잠실 일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책은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와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와 자매편이라 할 수 있으며 나머지 두 권도 찾아서 읽어 볼 계획입니다. 품격 있는 감상뿐 아니라 유익한 정보, 자료가 많이 들어 있어 좋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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