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토템과 터부 미래지식 인문 고전 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원당희 옮김 / 미래지식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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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중에 자주 인용되는, <황금가지>를 쓴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도 그렇고 프로이트 역시 "미개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요즘처럼 PC에 의한 규제가 일상화된 풍조에서는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언어 사용이지만, 거꾸로 독자인 저는 "그들"과 문명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들 사이에 (알고 보니) 별 차이가 없더라는 역설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토템과 터부는 비교적 근세의 역사 중에도 의외로 그 흔적이 흔하게 발견되며, 특정 역사의 국면에서 잘 이해가 안 되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태도에 이 프로이트적 개념을 적용하면 의외로 그 해석이 쉬운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 새삼 깨닫게 돠었습니다. 이런저런 문명의 더께가 덧씌워져 쉽사리 눈에 안 띄었을 뿐, 여전히 우리의 행동과 사고는 이성과 세련된 관습보다는 이런토템과 터부에 의해 좌우되는 면이 많았다고나 할지.


p41을 보면 "터부"는 그 의미가 상반되는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하나는 "신성함",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금지된, 부정(不淨)한" 등입니다. 이런 걸 두고 contranym이라 부를 수도 있겠는데, 중세 로마 가톨릭 교황이 행했던 sanction은 특별 허가와 금지의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오늘날도 국가 원수 등이 많이 변형되긴 했으나 이런 조치를 행합니다). 영어에서 cleave 같은 단어도 "갈라지다"와 "들러붙다" 두 가지 뜻을 다 갖습니다. 


정언명령(p48. 독일어로 카테고리셔 임페라티프)는 임마누엘 칸트가 정교히 정립한 개념으로서 본디는 어떤 조건이 붙지 않는 무조건적인 당위를 가리킵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 부모에게 효도하라 등은 어떤 정당화 근거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가장 원초적인 규범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따지는 게 하나의 습성이며, 따라서 의외로 이런 아득한 상위 규범조차 순수하고 엄격한 "정언명령"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바로 터부를 두고 정언명령이라 규정하는데 어쩌면 기막히게 맞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컨대 근친상간 같은 것에 대해 "왜 하면 안 되는 거지?"라 의문을 갖지 않고 곧바로 극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절대적인 금지의 범주에 넣습니다. 효도보다도 더 즉각적인, 절대적인 규범성이 부여되는 게 근친상간 금지입니다. 이걸 의심하는 자는 규범의 근원을 파헤치는 혁신가가 아니라 "좀 모자라거나 대단히 잘못된 인간"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터부의 설정은 윤리적인 각성이나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한 요구 같은 게 아니라, "악마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p49)"이라는 더 근원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p33을 보면 나일 강 상류에 거주하는 바소가 족은 심지어 가축의 근친상간에까지 벌을 가한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도 동성동본이라는 아주 광범위한 집단(거의 혈족이라고도 할 수 없는)에까지 통혼 금지 의무를 부여하는데 프로이트는 여러 원시 부족(일단 이 말을 그대로 쓰겠습니다)들이 심지어 같은 토템을 쓰는 범위 안에서도 혼인을 금지하는 풍속에 주목합니다. 독자인 제 눈에는 이게 매우 닮았습니다. 아마 프로이트가 생전에 이 관습을 봤다면 비슷한 결론을 내었을 텐데 우리는 오히려 광범위한 통혼 금지 터부를 무시하는 프로이트 같은 이를 미개인, 파렴치한, 금수 정도로 단죄했을 겁니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규범에 대해 이성과 강도가 약한 감정을 통해 "하지 말아야지! 지켜야지!"하고 다짐할수는 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어떤 신경증적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물론 사람에 따라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터부 사항은 일종의 강박신경증(츠방노이로제. p55)를 유발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떤 종류의 근친상간에 대한 상념은 이를 떠올리기만 해도 무척 마음이 괴로워질 것입니다. 아직 감정이나 생각이 무르익지 않은 청소년기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강박적 금지(츠방페어보트. p54)는 엄청난 전이가능성이 그 고유한 특징이다." 이는 예를 들어 소위 문명사회의, 프로이트 박사를 찾아온 여성환자들(과 그 지인들) 사이에서나, 마오리 족 사회에서나 거의 같은 패턴을 드러냅니다. 이를 신경증으로 규정하고 안 하고의 의의는, 저 뒤 p113에도 나오듯 그 해결책을 "(환자의) 현실 탈출"에서 찾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의사였으니. 


"터부의 원시적 초기에는 신성한 것(하일리히)과 부정한 것(운라인)을 구별하지 않았다(p51)" 이런 성격을 두고 프로이트는 p68에서 "양가성(암비발렌츠. 영어에서도 비슷한 발음이고 철자입니다)"이란 말을 씁니다(저 뒤 p105에도 다시 강조됩니다). 신경증이나 터부나 그 핵심 증상은 "접촉금지"라고 하며(p53), 만약 터부를 범한 자가 있다면 이제는 그 자신이 터부가 된다(p44, p60)고 합니다. 접촉공포라는 말은 저 뒤 p112에도 나옵니다. 중근세에는 예를 들어 보댕 같은 이가 왕권신수설을 논했는데... 프로이트는 논하기를 왕은 그저 권력과 무력, 권위 등을 가져 무서운 게 아니라 저 원시 부족들이 족장에게 있다고 여가는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힘과 거의 차이가 없는 무엇을 지녔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왕권 신수설"은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한 셈입니다. 책에서 프로이트는 잉글랜드의 찰스 1세 같은 비교적 가까운 시기(1633)의 왕도 백 명에 가까운 환자를 치유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고대의 샤먼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구분이 안 되는 셈인데 비슷한 시기 조선의 광해군이나 인조한테 가서 병을 낫워 달라고 청하는 백성이 있었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런 왕을 향해서도 저 터부의 본질 중 하나인 "양가성"은 여전히 남습니다. 책 p76 같은 곳을 보면 "오늘은 신으로 존경을 받다가 내일이면 범죄자가 되어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나곤 하는 지배자"란 구절이 있습니다. 러디야드 키플링의 장편 <왕이 되려던 사나이>를 보면 일단 여인에게 물려 피를 흘리는 망신을 겪은 대니얼 드래봇(한때 시칸더[알렉산더 대왕]의 후예인 신으로 여겨진)을 카피리스탄인들이 무참히 처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도 영웅은 그 상승기에 찬란히 부상하다가 몰락기에는 이루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며 오르페우스 같은 이도 죽을 때 광신여성들에게 갈갈이 찢겨 죽었습니다. 터부는 이처럼 신성하면서도 한없이 더러운 건데 우리 나라 무당들도 급할 때는 민중들이 가서 의지하면서도 평상시에는 천민 취급받은 걸 떠올려 보십시오. "종족의 구성원들은 이런 지배자를 경계하고 때로 지켜야만 한다(p48)." 그런데 각주(역주)를 보면 영어 번역문과는 강조의 포인트("지킴"보다는 "경계")가 조금 다른 듯합니다. 


프레지어 경은 그래서 "본래 사제를 겸하던 왕권이 종교와 세속 권력으로 나뉘어진 게, 각종 터부와 신성의 부담에 짓눌리던 왕들이 피치 못해 내린 결단(p80)"으로 해석합니다. 프랑스 왕, 신성 로마 황제 등도 교황에게 굴욕을 주고 종속시킬망정 자신이 그 역을 겸하지는 않았던 것도 현실적인 어려움 외에 이런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었겠죠. 지배자에 대한 감정적 태도가 이처럼 격렬한 무의식적 적의 요소를 포함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프로이트는 말하지만(p85) 이미 그는 다른 저작에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적의와 증오 등에 대해 자세히 논한 바 있습니다. 이걸 유추하면 이 역시 설명 안 될 바가 없습니다. 그의 천재성과 전례 없는 혁신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죠. p193에서는 "토템(동물)의 아버지 대체"도 언급됩니다. 


투사(投射. 프로옉치온. p98)는 어떤 고통을 전위(p109. 페어쉬붕)하거나 주체의 느낌을 대상으로 옮기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경영학에서도 인적자원관리이론 등에서 자주 다루는데 이처럼 본디 심리학 개념이죠. "살아남은 사람은 사랑하는 고인에게 적의를 품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고인의 영혼은 적의를 품고 애도 기간에 걸쳐 적의를 행사하려고 한다(p98)." 시에라리온의 티메 족은 선출된 왕에 대해 대관식 하루 전날에 매질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는 말도 p83에 나옵니다. 


p127에는 감염주술(콘타글뢰제 마기에)이란 말이 나옵니다. 주술의 핵심은 자연 법칙(때로 의학 법칙)을 심리학의 법칙으로 대치한다는 오해(p128)를 연상이론은 설명하지 못한다고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애니미즘의 핵심 원리는 '생각의 만능(알마흐트 데어 게당켄)'"이라 요약합니다(p131). 뭔가 맞는 듯하면서도 그 자신이 호되게 비판했던 이론에 대한 완전한 극복 지양에는 못 미치지 않냐는 게 문외한인 저의 소박한 느낌입니다. "생각의 만능"은 지적인 나르시시즘(p136)이란 표현도 있네요. 


3부의 마지막에서 애니미즘의 체계와 꿈생각, 꿈작업, 의미 등에 논한 후 프로이트는 4부에서 이상의 논의를 토테미즘과 대대적으로 결합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토템과..."인지 본격적으로 보여 주려는 듯 말입니다. 그는 기존 인류학의 성과를 매우 능숙하게 요약한 후, 협동주술 등 인류학 개념과 동물공포증, 야경 등의 의학적 개념을 화려한 언변으로 결합합니다. 죄의식은 자발적 금지, 사후 복종(p207)에 의해 치유되려 합니다. 아버지 중심의 부족은 혈연을 통해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형제 부족으로 대체됩니다(p211). "신은 그의 본질에 포함된 동물적인 부분을 극복한다는 뜻(p216)"에 이르면 왜 이 논의를 구태여 토템으로부터 끄집어내었는지 그의 의도가 최종적으로 확인됩니다. 유익하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그 논의 구조가 아름답기까지 한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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