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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나를 위해 - 누군가를 위한 인생 40년. 오늘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한 걸음 더
김동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저자분은 1946년생으로 거의 한평생을 포철(현 포스코)에 봉직하고 은퇴한 분입니다. 일생을 두고 조직과 가족들만을 위한 삶을 살았으나 이제는 잠시 숨을 돌려 "나 자신을 위한 삶"도 맛보고 싶다는 게 책 제목의 취지인 듯합니다.
"세상에는 논리를 따져봐야 소용없는 것들이 있다(p36)." 저자께서는 광주 출신 지인들과 함께 산행 끝자락에 항상 들르는 식당이 있는데, 그 식당의 위치가 구 광산면(현재는 자치구인 광산구) 오치면과 비슷하다 하여 식당을 오치, 주인분을 오치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맥락이 없고(p114) 논리도 없는 편의적인 명명이라 하시는데 본래 세상 모든 별명이 다 그렇죠. 이것은 별칭 통칭의 맥락이요 논리가 오히려 맞습니다. 다만 식당 사장님의 의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인 게 마음에 좀 걸리시긴 하나 봅니다. 많이 팔아주시면 된 거죠. 재미있는 건 그 사장님의 응대입니다. 고향이 수시로 바뀌는데 부산도 되고 대전도 된다고 합니다. 융통성이 그 호적상 팩트에 얽매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 좋습니다.
지리산에는 화엄사라는 명찰이 있죠. 그 각황전(p23) 앞에도 오래된 한 분이 있고, 순천 선암사에도 수령이 600 넘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신선"이라든가 "이분"으로 칭합니다. 역사가 오랜 한반도 곳곳에는 이처럼 수백 년 단위를 어렵지 않게 넘기는 수목들이 많습니다. 벚꽃을 보고 봄의 절정을 알고, 매화를 보며 봄의 시작을 안다... 구태여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매화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는 고르는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의 투영일 수 있는데 내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만인의 앞에 서고 싶은 이들은 벚꽃을 고를 수 있겠죠. 저자는 오랜 동안 기업에서 근무한 분인데 난데없이 기자가 되어 저 매화로부터 인터뷰를 따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집 근처에 양재천(p57)이 있다 하니 대략 어디 사시는지 알 만합니다. 산책은 발바닥으로 하는 것이다, 발바닥이 지면에 착착 닿아야 그 피로, 스트레스, 고뇌가 몸에서 땅으로 다 빠져나간다... 의학적 근거는 없다 하시나 당사자가 그리 믿으면 그때부터 의학적 근거가 생기는 법이죠. 이렇게 착착 발을 내디디면 몸의 나쁜 기운이 다 떨어져 나간다! 그리 믿으면 그리 되는 것입니다. "팔을 직각으로 꺾어 하늘을 찌르면서 다가오는 아가씨가 나를 보고 웃는다.(p58)"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어폰으로 누구와 대화를 하는(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외계의 누군가와 교신을 하는) 중이었던 겁니다. 세상은 참 그 내막을 모르면 자기 편할 대로 오해를 할 만한 여러 착각의 신호들로 가득합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늑대 같은 동물은 집단의 다른 성원이 보내는 의사표시를 못 알아듣는 순간이 바로 죽음을 뜻합니다.
"그때도 번화가이긴 했지만 지금은 복합적 상업지역으로 천지가 개벽한 듯 바뀌었다.(p60)." 홍콩 중심의 중환(中環)을 이름인데 저자는 30년 전부터 이곳에 파견되어 업무를 맡았다고 회고합니다. 울릉도 도동해안 산책로, 저곳 홍콩의 중환, 올림픽 공원, 경복궁 등이 저자가 즐겨 찾는 산책로라고 하네요. "다리뿐 아니라 생각도 함께 걷는다." 생각이 어딘가를 거닐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산책이겠습니다. 반대로 걸음은 물리적으로 어딘가를 걸으나 생각이 어딘가에 묶여 있다면 그게 적어도 산책은 아닙니다. p155에도 나오듯 따님은 아예 홍콩이 그 삶의 터전입니다.
"니싱푸마(伱幸福嗎)?"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데, 비록 회사에 바친 보람된 한평생이었지만 저자더러 북경 징산(景山.경산)공원의 인파가 "선생은 행복한가?"라 물으면 대답이 "스(是.시)"라고 바로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고백(p94)합니다. 남의 시선이 두렵지 않은 저들이 부럽다고 합니다. 소셜 미디어에 이런저런 글을 올리면 평소에 쌓아온 진중한 이미지가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연배쯤 되는 분들이 가장 신경 쓰는 대목이 여기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답은 누구나 잘 아는 바입니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요. 자금성을 내려다보며 그는 말합니다. 지금 내 인생 자체가 바로 횡재(橫財)이며 황제(皇帝)이다."
"단순화, 획일화, 편리함이 발전이고 개선이라고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았다(p113)." 소처럼 일만 하며 살아온 게 자랑이었는데 프랑스에서 그런 자신만의 긍지가 한없이 작아졌다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산업화, 근대화 모두 프랑스가 멀찌감치 앞선 나라인데도 여전히 남은 시골 마을은 우리보다 더 전통적이고,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모두 잃은 인간다움, 파격, 자연스러움, 여유 등은 그들이 고스란히 또 간직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유행가 가사 "모모는 철부지"를 읊조리며 어떤 인생이든 빠져서는 안 될 고갱이가 바로 사랑임을 깨닫는 저자입니다.
프랑스 등 외국뿐 아니라 이곳 좁은 반도, 그 중에서도 남반부지만 풍광이 다채롭고 사람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사로잡는 고장이 많습니다. 책에는 울릉도에 들러 찍은 여러 사진들이 실려 있습니다. 나리분지, 편지, 외로움 등이 여정의 키워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착각하며 예사로 넘기지만 실은 전혀 알지 못하던 여러 대상들에 대해 생각과 느낌을 다시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집안 정원 등을 꾸밀 때 선장후로, 즉 먼저 감추고 서서히 드러내는 억경(抑景)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풍경을 주변에서 빌려와 이를 자연스럽게 꾸미는 방법을 쓰는데 이걸 차경(借景)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저자는 호암미술관의 조경을 언급하며 나는 과연 주위를 끌어안으며 살아왔는지 먼저 돌아볼 것을 충고하는 듯도 합니다. "뒤돌아보니 우리는 어느덧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p174)." "이 영감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p212)" 진심으로 시도하는 소통, 혹은 인생은 표현 방법에 무관하게 결국은 공감과 동의를 얻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