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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블루 - 지극히 사적인 섹슈얼리티 기록
임은주 지음 / 비비드 / 2021년 11월
평점 :
품절
남자는 남자라서 고독하고 힘든 부분이 있고 여성은 여성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우울하고 힘들며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포인트가 따로 있습니다. 책표지에는 "지극히 사적인 섹슈얼리티 기록"이란 부제가 붙었으니 남성 독자가 읽기엔 다소 삼가게 되는 기분도 들었으나 오히려 이런 기록, 고백은 남성이 더 적극적으로 읽고 여성 보편의 감성과 소통을 시도할 필요도 있겠다 싶었네요(라고 하기엔 수위가 좀 높긴 합니다).
부친께서는 매우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나 그 내면에는 엄청난 에너지, 창조성, 어떤 디오니소스적 이데아를 향한 열망 등이 깃드신 분이었던 듯합니다. 그저 난봉꾼인 것과 이처럼 예술가 기질 다분한 분의 스타일은 곁에서 보기에도 뭔가 차별화되며 그 나름 이유와 정당한 근거가 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게도 됩니다. 물론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결코 아니며, 그런 자유분방함 속에 나를 지키는 게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배우자(있다면)를 힘들게 하며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데 이 역시 평범한 사람이 태연히 감수할 성격은 아닙니다. 본인은 편하지 않겠나 싶어도 별반 그렇지 않지 싶습니다. 뭐 당사자가 아니니 알 수는 없지만.
"OO는 새로운 상대와 할수록 더 OO된다(p5)." 물론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매번 새로운 상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행위는 일종의 모험이라 상대에게 나의 모든 걸 드러낸다는 게 여간 간이 크지 않고는.... 여튼 그렇게 자유롭게 상대를 만나고 행동에 옮긴 분도 "여전히 못다 푼 문제(p6)"가 있어 딸에게 물려줬다는 걸 보면...(물론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는 건 아니겠죠)
"OOO에서 약 1cm 살집이 올라왔다. 이대로 여자가 되는가보다 상상했다(p36)" 이게 초5때의 경험이라고 하는데 물론 다 그 맘때 이런 과정을 겪습니다만 어른이 되어서도 잘 생각이 날까요? 본문의 화자는 아마 40대 정도인 분으로 짐작되는데... 화자는 J여고(구체적인 학교 이름이 나오네요)에 다녔다고 하는데 아침 등교길마다 그짓을 하고 달아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잘 안 됩니다. 그냥 화자의 상상이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p38에는 의사가 산부인과보다는 신경정신과로 갈 것을 권했다는 대목이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나는 이 기억을 재편집하고 싶다(p22)." 보통은 어렸을 때 끔찍한 경험(꼭 성 관련이 아니라도)을 하거나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이런저런 회고들은 하나같이, 더군다나 아무리 읽어 봐도 분명한 여성인 화자가 끔찍한 일들을 당한 기록입니다. 정말로 누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재편집이 아니라 아예 지우개로 빡빡 지우고 새 내용을 적어 넣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독자인 저는, "OO가 되고 싶었다(p32)"는 화자의 말에서 짐작 가능하듯, 여기 담긴 내용이 사실은 화자가 직접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한계까지 끔찍하고 더러운 일을 겪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화자가 그냥 상상으로 치러낸 OO 오디세이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말하자면 역 재편집이자 창작이 아닌지... p30에는 어느 양복을 입은 남자와 밤을 보낸 후 신촌에 있는 장미여관(!)을 빠져나온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얼마 전에 타계한 그 교수님의 핵심 테마(?)가 아닙니까? "인생은 OO와 얼마나 가까운지에 의해 결정된다(p31)." 그럴까요?
"B는 여자였다. 여자였던 걸로 추정하지만 성별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p49)." 그럴 수도 있을까요? "머리가 짧고 키도 작고 목소리도 몸가짐도 크지 않았다." 확실치 않으면 애초에 안 엮이면 되는데 저 앞에 p23를 보면 성은이를 향한 화자의 태도는 진짜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여성인 자신이, 남자들의 시선을 닮으려 하는 건지요? 그렇게 "봐서" 무슨 쾌감이 느껴집니까? 그래서 (한참 뒤에) B와 함께 잔 건가요? 한참 뒤 p110에서는 필리핀 출신 어느 여성 청소년과 자신이 "단절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다"는 말이 나오긴 합니다. p182에는 "퀴어 모임"도 언급됩니다.
C는 확실히 남자(!)였는데 화자에게 실망했다고 하며 어떤 운동(뭔지는 생략합니다)을 권합니다. 그런데 더 읽어 보면 문제는 화자가 아니라 그 C에 있었던 듯합니다. 지가 OOO면서 남의 OO를 탓하다니 본인은 대체 무슨 운동을 해야 그 문제가 극복되겠습니까? 운동 갖고는 안되고 아마 시술을 받아야 할 듯합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주제 파악이 안 되고 남탓을 제딴엔 한다는 게 그만 자기 소개를 하고 마는 바보들이 꼭 있습니다. 어이가 없죠. "내 판단력에 하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맞습니다. 이와 대조되는 남자는 p59에 나옵니다. length로 2.5배 차이 나는군요. p52:4에서 "주우러"가 맞겠죠? p79에 나오는 "상식은 부족했던 남자"도 기술은 매우 좋았다고 하나 다만 데이트 폭력이 큰 문제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흉물스럽다(p55)"거나 숭헌 것(p35, p39)" 소리를 듣는 게 있습니다. 이건 다 위선이고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자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하시며 반대로 남동생의 OO에 대해서는 대놓고 예찬하는 모습인데 사실 나이 든 여성들이 남성의 사고와 관점을 이식받아 사는 전통 사회에서 드물지도 않게 봐 오던 거죠. 그 왜곡상과 병폐는 새삼 지적하기도 번거롭습니다. 이런 남동생에 대한 편애는 할머니뿐 아니라 엄마도 마찬가지인데 이 남동생은 몇 년 전 경영하던 사업체가 부도나서 해외로 도피했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래도 학교는 좋은 데를 나와서(화자도 마찬가지) 일단 버젓한 자리는 만들었던 셈이네요.
"연대 알 독수리 다방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p65)." 이 세대분들이 매우 자유분방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글로 읽으니 더 충격입니다. 얼마 전 모 대학(공교롭게도 아마 지금 이 대학인듯?)에서 남녀가 벌인 행각이 영상으로 찍혀 큰 문제가 되었는데 여기도 "관음숲"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네요. 설마 이름이 그리 붙었을까 싶기는 한데. 여튼 정성을 다하는 남자가 여자를 가장 크게 감동시킨다는 점은 여기서도 확인 가능하네요. 주로 활동하신 곳이 이 근방(신촌, 홍대앞)인가 봅니다. 그런 데가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p112에는 "홍익산부인과"도 언급됩니다. 물론 강남역 "O진O산부인과"도 등장하고, p130, p150, p178, p185에서는 저 멀리 부산 개금역 근방이나 보수동, 광안리, 망미역(각각)도 볼 수 있네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는 아주 예전 영화가 있었습니다만 이 책에선 유독 "배낭여행"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p74 이하. 또 p70). 여기서도 아주, 참, 읽기만 해도 갑갑해지는 경험담이 등장하네요. 지금 이런 건을 고소하면 적어도 한국에서는 나은 대우를 받겠죠? 스위스는 사실 아주 보수적인 곳이라서 기대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야마시타 상, 모토코, 닉, 스티브, 조지(p112), 어느 재미교포 혼혈(p120), 또 이태원에서 일할 때 만났던 외국인 손님들 등 다양한 남자들에 대한 기억이 이어집니다. 약간 머리가 아프기도 합니다. "공부하면서 일하는 가운데 춤추며 맛본 OOOO는 나에게 빛이었다(p105)." 이때 "빛"이라 함은 초등학생 때 남동생과 해변에서 주운 조약돌을 (부싯돌처럼) 마주치며 보게 된 그런 빛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 연상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아주 긴 여행기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만 에필로그에 나오듯 주된 테마 중 하나는 폭력과 그에 대한 트라우마입니다. 왜 이렇게 성(性)은, 가장 아름답고 달콤해야 할 것이 비극적이게도 폭력과 자주 결부될까요? 남성이든 여성이든(특히 전자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대로 우울하거나 아주 어둡지만은 아닌 분위기인데 독자는 다시 저 앞의 "OO가 되고 싶었다(p32)"라든가 "OO는 아름다웠다" 같은 화자의 말을 곱새겨 봐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