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이후의 삶 - 지속가능한 삶과 환경을 위한 '대안적 소비'에 관하여
케이트 소퍼 지음, 안종희 옮김 / 한문화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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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으로 퇴행시킨 세계,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극도로 어두워지는 세계(p20)". 이는 저명한 언론인인 데이비드 월러스웰즈의 말을 저자가 재인용한 것입니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앞으로는 훨씬 더 나아지리라는 확신에 거의 차이가 없다시피했습니다. 21세기를 20% 넘겨 지낸 지금 과거에 기대했던 것보다 우리가 이뤄낸 게 훨씬 적을 뿐 아니라, 전염병의 만연으로 과연 예전의 안정과 행복 수준이나마 회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인류는 여태 계속 진보만 이뤄온 게 아니고, 예를 들어 몽골 훌라구가 일으킨 바그다드 대학살 같은 사건은 문명의 수준을 수백 년 퇴보시켰을 뿐 아니라 도덕성과 자존감에까지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해도 진보와 향상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현실 자각은 우리 마음을 무척 우울하게 만듭니다. p21에는 <통섭>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도 인용됩니다. 


확실히 인류는 2차 대전 이후 분수에 넘게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1970년대 미국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했는데 이 같은 달러 과잉은 1960년대까지 미국 정부가 금 태환을 계속 실시했던 탓도 있을 것입니다. 해외로부터 작정하고 달러로 금을 교환하는 공급이 이어졌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미국 시민들의 과소비(부채에 기반한)가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미국은 달러 증발에 신중할 뿐 아니라(최근 같은 코로나 시국은 예외), 금 태환이 중지되었으니 외국에 푼 달러가 이상 유입되는 경우는 드물어졌습니다. 미 정부도 대외 금융 스킬이 더욱 노련해진 거죠. 허나 이는 재정금융정책 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일뿐 실물에서 성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력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더 이상 가솔린 등 탄소 연료를 사용한 차를 만들 수 없게 되어가며 미국 자동차 업체도 (아무리 내수 시장이 크다고 하나) 이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러면 거시경제를 선도하는 자동차업계의 성장부터가 벌써 둔화됩니다. 테슬라 등 새로운 전기차 섹터의 성장성은 아직 기대만큼 충분치는 않습니다. 


"자연이 문화속으로 흡수되고, 문화가 자연으로 흡수되는(p30)" 관점을 저자는 포스트휴머니즘 여러 진영의 주장으로부터 공통점으로 추출합니다. 포스트휴머니즘이란, 그 "포스트"라는 접두어에서 보듯 어느 정도는 휴머니즘을 극복 지양하는 사조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오로지 인간이, 인간만을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며 논증을 기초로 사고와 행동을 조정하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응답을 모색(p31)"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즉 저자는 포스트휴머니즘보다 더 강력한 환경친화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족보를 하나하나 짚으며 그 철학적 근거부터를 공격하는데 이 부분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어떤 입장은 자연에 대해 "신 애니미즘적 의의"를 부여하며 유기체와 비유기체,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 등의 구분은 애초에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특히 현대 대중들에게 그 신선함으로 큰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부실한(?) 철학적 기초로부터 친 환경적 결론을 도출하는 건, 환경 오염과 생태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호도, 오도한다는 점에서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이것이, 이런 진영들에서 오가는 논쟁에 익숙지 않은 독자 입장에서는 제법 큰 충격일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구분이 되는 영역, 존재들이며 이런 바른 전제로부터 환경 위기, 문명 위협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그 극복을 위한 올바른 대책이 나온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저 결론만 환경 보호만 외친다고 무조건 옳고 동료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뜻이죠. 


또한 저자는 전통적인 좌파 진영의 입장, 즉 각성한 노동계급이 모든 사회 변혁의 주체이며 원동력이라는 대전제도, 크게 변화한 현대 산업 구조에 비추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책 p47에서 인용되는 폴 메이슨의 "글로벌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언표를 들며 노동계급의 특권적 독점적 위치를 부정하는 한 논거로 씁니다. 마오와 소련 공산당 사이에 벌어졌던 "농민이 노동자와 함께 혁명의 동등한 주체가 될 수 있는지"의 논쟁도 약간 생각이 나고 그렇습니다. 


사실 토니 블레어 같은 사람은 등장 당시 "제3의 길"을 주장하며 책 p52에 나오는 대로 New Labour(신노동당)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는데 정말 오랜 동안 보수당이 장기 집권하던 터였으므로 이는 큰 기대를 부르는 변혁의 선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는 앙마르슈라는 당을 새로 만들어 기존의 넌덜머리나는 좌우파 정당을 대체한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의 노선과도 닮았으나 그 역시 현재 많은 한계에 부딪히는 중입니다. 


과거에는 선정적인 모델을 앞세워 즐겁고 원색적인 소비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마케팅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소비 행태가 자연을 착취하고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기피됩니다. 그런데 최근 한 세기 동안의 폭발적인 성장은 이런 인간의 본성에 의해 견인되었지만, 이제 이런 소비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게 여겨진다면 성장의 동력은 무엇에 의해 마련될까요? 그 대안 중 하나가 "대안적 쾌락주의(p69)"입니다. 무엇이 즐겁다 아니다는 그리 여기는 인간의 마음가짐, 사고 체계, 가치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를 들면, 비건인들도 육류 섭취 거부를 통해 큰 인간적 자존감을 높이고 환경 보호에 기여한다는 보람을 얻으며 더불어 육체적 건강, 날씬한 셰이프까지를 얻어내니 이게 마인드셋 개조를 통한 대안적 쾌감의 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실천에 옮기기 힘든 행위를, 도덕적 의무감만으로 억지로 자기부정을 해 가며 행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것이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이 새로 생겼는데(p106) "위태하다"는 뜻의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자동화는 이미 1990년대부터 노동자의 일자리를 위협해 왔고 그보다 훨씬 전 1차 산업혁명 당시부터 공장 노동은 인간 자존을 낮추고 생산, 경제, 사회, 삶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습니다. 주당 노동시간의 과도한 부여는 단지 사용자 중심의 노동력 추출이라는 목적 외에도, 비인간적인 노동이 끼친 정신적 위축을 보상하기 위해 약탈적, 감각적, 쾌락지향적 소비를 부추기며 해당 산업을 필요이상으로 키우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노동자의 혹사와 자연 파괴는 서로 동전의 양면 관계에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사람은 자유시간이 있어야 진정한 자기계발을 할 수 있으며 이 전제를 고도로 발전시킨 입장이 바로 대안적 쾌락주의입니다. 사람에 따라 무엇을 쾌락으로 삼느냐는 천차만별이며 사회의 대세를 이루는 쾌락 추구 방식을 어떤 이유로건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쾌락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와는 반대를 이루는 게(저자의 분류에 따르자면) 기술 유토피아주의입니다. 특히 제레미 리프킨 같은 분은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로 인해 앞으로는 거의 모든 서비스와 재화의 한계생산비용이 0에 가까워지며 더 이상 희소성의 원칙이 통하지 않는, 반대로 풍요의 원칙이 지배하는 경제가 도래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회 일각의 경향성을 잘 반영했을 뿐 전면적 현실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저자는 대안적 쾌락주의를 특히 5장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그 특유의 상상력이 주는 효용과 즐거움"을 강조합니다. 어쩌면 이는 아주 부분적인 교차점을 갖기는 하나 아마존이 초기에 대박을 친 원인인 롱테일 마케팅과도 닮았습니다. 비주류 소비는 개개로 놓고 보면 아주 소수라서 종래의 오프라인 마케팅과 설비로는 이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아마존은 이런 작고 작은 소비 수요를 모두 자신으로 끌어들여 큰 볼륨의 매출로 합산할 수 있었고 이것이 아마존을 세상에 널리 알린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래의 주류(主流) 소비는 예컨대 패션을 따라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구매한다는 착각을 얻는 패턴이었습니다. 내일 생활비도 조달하기 어려우면서 빚을 내어서라도 명품을 사야 한다는 멍청한 부류가 이에 속하죠. 지역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하여 생태환경을 지키는 소비(p168)를 하는 게 대안적 쾌락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나 "대안"인 만큼 그 양태는 이 외에도 여럿이 있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사상가인 프루동이 이 맥락에서 다시 소환됩니다. 또 저자는 p178에서 기독교의 구약에 나오는 착한 며느리 룻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키츠도 인용합니다. 자연과 인간과 동물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이상향을 묘사한다는 맥락에서입니다. 


사실 영국(잉글랜드)은 아일랜드를 오랜 시간 동안 정복과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같은 섬나라지만 민족 구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에서였고 특히 아일랜드는 일본에게 큰 시련을 당한 우리 민족 입장에서 큰 공감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책 8장에서는 아일랜드 특유의 켈트적 문화, 영적 분위기 등 고유의 자연친화적 성격이 자세히 설명되는데 올해 팔순을 맞는 옥스퍼드 출신 노장 페미니스트 여성학자로서 사실 아일랜드 배경은 없는 분이 이처럼 큰 비중으로 아일랜드 예찬을 펴는 태도가 흥미롭게 보입니다. 


저자의 결론은 대안적 쾌락의 추구, (기술 만능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네트워크 기술의 존중, (비과학적 범신론을 비판하면서도) 아일랜드식 문화에의 주의깊은 관찰, (포스트휴머니즘을 지양하면서도) 자연친화적 삶의 지향, (전통적 마르크시즘을 비판하면서도) 좌파 이념의 새로운 정립 등을 강조합니다. 허술히 지나칠 대목이 없는 꼼꼼한 이론서로서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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