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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동 입원일기 - 꽃이 좋아서 나는 미친년일까
꿀비 지음 / 포춘쿠키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래 전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라는 영화(원작은 소설)가 개봉되어 정신병원의 비인간적인 환자 관리와 인권 침해를 고발하는 데 일조한 적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려 40년도 더 된 이야기이며 오히려 요즘은 저런 작품이 정신병동 환우들에 대한 고정된 편견을 강화할 우려마저 있습니다. 실제로 정신병동 역시 내과나 외과처럼 병이 길어지면 누구나 입원할 수 있는 하나의 의료기관일 뿐입니다. 정신병동에 실제로 입원한 적 있는 작가님이 그림과 함께 들려 주는(사실상 만화가 메인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p76 이하에 실려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라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병원식 하면 "맛이없다"라는 이미지가 거의 자동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병원식이란 건 여튼 환자의 건강 등 이런저런 요소를 고려하여 그리 나오는 것이므로(대체로는요) 환자 입장에서는 여튼 준수해야 하는 식단이겠습니다. 그런데 정신과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느날 (선택사항으로) 라면이 나왔나 봅니다. "나는 이렇게 건강한 맛 나는 라면은 처음 먹어 봤다.(p26)" 라면은 사실 집에서 먹을 때에도 가장 싸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메뉴입니다. 건강 생각하면 먹질 말아야 하는데 장소와 상황이라는 게 있다 보니...
"우울하다 보면 못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p140)." 물론입니다. "못된 생각, 나쁜 생각"이란 표현을 우리가 이럴 때 종종 쓰곤 하죠. 그건 분명 못되고 나쁜 생각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우들에게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게 바로 (소위) "정상인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혹은 "우리들")은 결코 정상인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정상인"이다 뭐다 하는 표현은 요즘 쓰지 않는 게 권장되는지도 모릅니다.
작가님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지만 p62에 자신이 잘생긴 줄 모르는 어느 신입 남성 환자를 두고 "꽃돌이"라 표현한 걸 봐서 여성이 아니실까 저는 짐작합니다. 하긴 이 역시 근거 없는 선입견일 수도 있죠. p141에 보면 "나도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 이런 말을 읽으면 마음이 너무 아파집니다. 아니, 왜 안 되겠습니까? 책날개에 보면 작가 꿀비님이 스스로를 소개하길 "아직은 앞에 나서기가 쑥스러워요"라고 합니다. 이 말이 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약간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작가님 본인도 "자신이 충분히 멋진 분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빨리 확신을 가지고 독자들 앞에 나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독자들이 더 성숙해질 필요도 있을 겁니다. 아니 그래야만 하겠죠. 작가님 나이에 대해서는 p224, 또 p27에 직접 언급이 있습니다.

p59에 보면 작가가 "반성"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틈날 때마다 영문 논문 들고 다니며 보시는 주치의 선생님, 언제나 바쁘게 뛰어다니시는 간호사 선생님들. 방탄소년단보다 바쁜..." 정신과에는 무섭게 생긴 덩치 큰 남성 여성 간호사들만 있고 의사쌤들은 편집증적이고 가학적인 싸이코들만 진을 칠 것 같다는 게 사실은 저런 픽션이 끼친 악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저 영화에서 배우 루이스 플레처가 열연한 그 캐릭터나 <양들의 침묵>에서 칠튼 원장 같은 사람 말입니다. 작가님의 말은 "더 바쁘게 살지 않았던 데에 대한 반성"이지만 우리들도 정신과 하면 환자건 의료인에 대해서건 간에 대뜸 이런 이미지만 떠올리던 그 관성을 반성해야 하겠네요.
주치의 선생님이 사실 뭘 들고 다니는지 아마 다른 환자라면 눈여겨 보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작가님이 그게 "영문 논문"인지 알아봤다는 데 저는 주목했습니다(물론 개인적으로 물어 봤을 수도 있지만). p199를 보면 작가님이 "RISS에 가면 논문을 음성으로 읽어 준다"고 한 걸로 봐서 대학원 재학 중이지 싶습니다. 등록금 다 냈으니 반드시 학위를 따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 영문 논문이 눈에 더 잘 띄었을 수도 있죠. 이렇게 학구적인 분이니 회복(참고로 이미 퇴원은 하신 분입니다. p188 이하, 혹은 p27 등)도 더 빠를 것입니다. 교수님에 대한 얘기는 pp. 44~51, 간호사 선생님들과 다른 고마운 분들에 대한 얘기는 pp. 52~60에 나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작가님과 일면식도 없는 제가 다 고마웠는데 정신병동 환우들에 대해 이처럼 잘해 주시는 게 뭔가 마음이 든든해서였습니다. 우리나 우리 주변의 지인들이 혹시 입원하거나 하면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겠다는 안심 때문이죠.
사실 이 책의 그림만 봐도 작가님은 엄청 밝은 분입니다. "하긴 내가 봐도 나는 엄청 밝아 보인다(p158)" ㅎㅎ 작가님은 자신이 안 불쌍하다고 화를 내시는데 무척 귀엽습니다. 순수회화를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 뭐가 불쌍하냡니다. 이제 다 낫고 활동 시작하시면 그 웹툰이 인기 끌어서 돈 좀 버시겠죠. "호박꽃도 꽃이고 너도 나도 세상 모두가 다 꽃이다(pp. 182~183, 또 p77 이하)"라고 하십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잘 알려진 문장을 웅변학원 교재에서 처음 봤는데 정확한 출전을 모르겠습니다. 여튼 건강에 안 좋으므로 담배(p183)는 좀 피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골치 아픈 문제가 나를 괴롭혀도 말입니다.
p63을 보면 "정신과에는 괴물이 있을 줄 알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카툰을 보면 괴물이라기보다는 좀 귀여운 이들이 보입니다만... 여튼 이게 정신병원 하면 가장 많은 이들이 먼저 떠올리는 편견 가득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이었다." 이 말도 뭔가 뜨끔하지만 더 찔리는 건 다음의 한 마디입니다. "솔직히 당신은 용기 없어 오지 못하고 있잖아." 아니 과장이 아니라, 우리 현대인은 워낙 복잡한 소통을 하다 보니 정신에 상처 난 곳 한둘 없는 이가 없습니다. 그럼 가서 치료를 받아야죠. 치료를 받아야할 상황에서 안 가고 버티는 건 어리석고, 버티고 싶지 않으나 병원에 가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안 가는 건 (작가님 말대로) 용기 없는 짓이 맞습니다. 어리석거나 용기 없음을 넘어 근거 없이 누구를 이상하게 보는 건 심지어 나쁘기까지 합니다.
p11을 보면 "의사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해 주길 바랐다. 입원하면 진짜 정신병자가 되는 거니까"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우리 모두의 평균적인 정서입니다. 용기 있게 찾아갔고 입원까지 하며 병을 거의 다 낫게 하신 사례를 보며 아마 독자들 중 많은 이들도 함께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다. 책도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어둡고 무서워지는 대목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이유에서도 이 책이 참 뜻깊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