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끝에서 만나
안지숙 지음 / 문이당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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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은 박현도, 도원재, 추미림, 박현서(박현도의 여동생), 오홍규, 정미소, 강민주, 성용(성씨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탐욕스럽고 음흉한 자이언트 社 대표 등입니다. 박현도의 부친과 모친, 경비 아저씨도 잠깐 등장합니다. 아마도 가상세계, 혹은 현도의 꿈 속으로 여겨지는 프롤로그에서만 잠시 "박현도"로 3인칭화하고 소설 본문에서는 내내 "나"라는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입니다. 


소설 속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여러 번 언급됩니다(p128 등 여러 곳). 박현도가 도원재를 자신의 데미안으로 여긴다는 암시, 아니 암시가 아니라 명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원재는 뭐랄까 더 자기 감정을 성숙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인격이며, 업무 능력도 더 뛰어납니다. 여기 등장인물들은 모두 게임 개발, 혹은 앱 개발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입니다. 박현도의 여동생인 현서는 전문계 고교를 나와 회계 쪽에 적성이 있는 인물인데도 오빠의 회사에서 게임 개발 업무를 (본연의 직분도 물론 하면서) 돕습니다. 


p44를 보면 추미림이 자신의 경험을 박현도에게 털어놓는 대목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 발레를 배웠는데 턴이 그렇게나 안 되더라는 겁니다. 이유는 미림 자신 생각으로, 더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웠고 아마 그때 몸에 힘이 들어가는 버릇이 이미 들어서라고 합니다. 이 말이 체육학적으로 맞고 그르고를 떠나, 일단 현도는 왜 미림이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지를 이해 못합니다. 


p76부터 이십 여 쪽에 걸쳐 이어지는 이야기는 박현도의 어린시절에 대한 것입니다. 그의 부친은 원래 사업가였는데 무슨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느 교회의 열성 신도가 되었고 집사 일을 보다가 드디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열성은 가득했으나 그의 마음은 평온을 찾을 날이 없었고 가족들에겐 엄격 잔혹했으나 신도들 앞에서는 자애로운 인격을 전시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환자로 보입니다. 마음이 평안치 못하고 잘못된 인격 설정으로 인해 스트레스도 극심했을 테니 암에 걸린 게 이상하지 않고,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납니다. 20억을 받을 수도 있었던 건물과 부지를 어느 기독교 단체에 8억이란 헐값에 팝니다. 죽어서까지 가족에게 손해를 끼친 셈입니다. 이때 어린 현도에게 심어진 강박이, 그 실존이 의심되는 가상의 이상향인 에덴입니다. 소설 결말에 밝혀지지만 에덴은 사실 모든 시공간이 사멸하는 블랙홀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생명과 죽음이 사실 동전의 양면이었듯 말입니다. 


박현도에게 이런 어린 시절의 불쾌한 기억은 아마 어려서 태권도를 "잘못" 배워 몸에 힘 빼는 법을 잊었다는 미림의 체험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더 좋은 행동과 판단, 감정으로 유도할 능력이 있고 사리 판단이 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도원재와 엮이는 대목에서는 부도덕한 행동을 곧잘 합니다. 미림은 원래 도원재의 여자친구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미림을 놓고, 도원재의 복무 기간 중 유혹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상한 액션으로 결국 결혼에까지 이릅니다. 명백하게 절친의 애인을 가로챈 파렴치한 행동으로서 자칫하면 뭐 칼부림이 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또 부도덕한 짓입니다. 미림을 그리 간절히 원하자도 않았기에 더 이상합니다. 어려서 그 부친에게 강요받았던 과시용 선행에 대한 반발감도 있고, 도원재에 대한 이런저런 열등감, 질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 <데미안>이 자주 언급되지만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는 박현도와 도원재의 관계와 별로 닮은 데가 없습니다. 물론 도원재가 외모, 지능, 인격 모든 면에서 박현도보다 나은 걸로 보이지만 그는 박현도를 patronize할 의도도 없고 남 일에 그리 개입하는 성향도 아닙니다. 적어도 데미안은 결코 도원재처럼 내향적인 성격이 아닙니다. 도원재가 거의 언제나 손해 보고 양보하고 이해하며 넘어가는 편이지만 박현도에게 어떤 우월적 지위를 점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호구 취급 당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박현도는 (그리 큰 필요가 없는데도) 비정상적으로 보냈던 어린 시절 사실상 "부친의 부재"에 대한 보상을 원했는지 친구 도원재에게 데미안 역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이처럼 함부로 하질 못했습니다. 감히 말이죠. 따라서 박현도가 하는 짓은 일종의 복수이며 물론 엉뚱한 상대를 잡아 부친 대용으로 쓰는 겁니다. 이게 일종의 "어렸을 때 잘못 배운 태권도"라고 하겠습니다. 힘을 얼마든지 빼고 잘 할 수 있는데도 심인성으로 그게 안 되는 거죠. 


이해가 안 되는 건 추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2002년작 샘 레이미 연출 <스파이더맨>을 보면 메리 제인은 사실 모든 면에서 피터보다 우월한(우월했던) 해리를 좋아합니다. 잘생기도 돈도 많고 학교에서 인싸고... 메리 제인은 배우를 향한 꿈이 깨지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하는 초라한 모습을 피터에게 들키면서도 끝까지 하는 말이 "해리한테는 말하지마"입니다. 그 말은 피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죠. 메리 제인은 자신의 진정한 내적 특성, 감정 등을 잘 알지도 못한 채 외적 조건만 보고 해리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속물이고, 해리하고 끝까지 잘할 자신이 없어 일단은 피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비겁하기까지 합니다(초능력은 일단 나중 문제). 저는 이 소설 속의 추미림이 그 메리제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추미림은 처음부터 박현도를 거의 경멸하기까지 했지만 결혼을 그와 했고, 그런 결혼이 오래갈 리 없습니다. 나쁜 건 박현도도 마찬가지여서 원하지도 않은 채 남의 애인을 가로챘고 원나잇도 아닌 결혼까지 감행하여 퇴로 차단의 도장을 찍은데다 나중엔 대충 살다가 헤어지기까지 합니다. 남의 감을 찔러 터뜨린 후 먹지도 않고 버리는 심뽀입니다. 


해리 오스본이나 데미안에 비길 건 아니지만(?) 도원재는 이미 업계에서 이름이 난, 능력 있는 개발자입니다. 박현도의 작은 스타트업 직원들도 그의 이름을 다 알 정도입니다. 박현도가 이런 작은 회사 하나 제대로 못 꾸려 가며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는 동안(이것도 그 부친을 닮았죠), 도원재는 특유의 능력을 잘 살려 얼마든지 큰 돈을 벌고 박현도의 회사 같은 것 정도야 여럿을 차릴 만한 그릇이 되건만 돈 벌고 출세하는 데 관심이 없어서인지 내내 알바 인생인 것 같습니다(오라는 데는 많지만). 친구 같지도 않은 녀석이 페이도 넉넉히 못 주면서 알바 뛰어 달라는 뻔뻔한 요청을 무슨 대의명분이나 지키는 양 넙죽 받아 열심히 합니다. 


박현도는 참 우스운 게,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을 단계부터 누군가가 배신하여 자신의 에덴 프로젝트를 파국으로 몰고가리라는 의심에 빠집니다. 물론 그 일은 실제 벌어지기 직전까지 가긴 합니다만 박현도는 어떤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특유의 망상 강박으로 스스로를 들볶는 겁니다. 자신이 예전에 융통성 없이 군 덕에 구치소까지 갔다 온 오홍규(물론 이건 박현도를 비난할 게 아니며 그는 원칙대로 했을 뿐입니다. 만약 홍규를 봐줬으면 그도 공범으로 몰렸겠고 무엇보다 정미소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거죠), 언젠가는 자신에게 복수를 할 것으로 의심되는 도원재 등을 의심합니다. 희한하게, 도원재를 의심하면서도 면전에서는 무척 관대하게 굽니다. 물론 자신의 원죄가 있어서이지만. 


결말에는 반전이 있습니다(이 서평에서는 생략). 에덴이 알고보니 블랙홀이었던 것처럼 어쩌면 예수와 유다도 한몸인지 알 수 없는 게 우주의 섭리입니다.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입니까? 박스 안의 고양이는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속담처럼, 어쩌면 모든 물리 방정식도 그 풀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답이 없는 게 결국은 답"인지도 모릅니다. 배배꼬인 현도, 미림이 못지 않게 걔네들 버릇을 끝까지 안 고쳐 주고 방치하는 "가짜 데미안, 가짜 형(오빠)" 도원재도 멍청이이거나 위선자입니다. 아니 정말로 순수하고 착했던 건 주인공 박현도(와 그의 부친)인지도 모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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