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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아이패드 여행 드로잉 ㅣ 퇴근 후 시리즈 15
이거니 지음 / 리얼북스 / 2021년 11월
평점 :
퇴근후라고 해 봐야 고작 대여섯 시간도 안되는 짜투리인데, 이 지쳐 있고 짧은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지도 직장인의 능력입니다. 재충전만 잘해도 이 시간은 보람과 의미로 채울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은 탈진한 자신에 대한 비생산적인 연민으로 날리기가 일쑤입니다. 이 시간을 "여행"으로 어떻게 보낸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되었으나, 포인트는 "드로잉"에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p64의 "이탈리아 베네치아, 부라노 섬의 독특한 집"을 보면 이 집을 예쁘게 그리는 방법이 나옵니다. 아마 작가님이 실제로 여행을 다녀오시고 현지에서 찍은 사진을 모델로 삼아 이렇게 그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림 하나, 형태 하나를 그리는 데도 마치 네이버 한자 사전에서 획수 하나 하나 쓰는 법을 순서대로 gif파일로 보여 주듯 단계별로 정지화면을 잡고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따라해보기가 아주 쉽다는 게 단연 좋습니다. 진짜 이렇게 가르쳐 주면 적어도 이 작가님의 스타일 안에서는 못 그릴 형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따라하는 걸 가르치는 책은 이렇게 예시 그림과 함께 자세히 가르쳐 주는 게 최고입니다. 따라해보라고 하면서 중간과정이 생략된 책들을 보면 인강이라도 따로 끊으라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세로선을 그을 때 마치 윈도 그림판에서 shift키 누르고 그리면 직선이 반듯이 표현되는 것처럼 아이패드도 <모양편집> 기능을 이용하면 선이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p66을 보면 문 안의 정사각형 무늬들은 그리 반듯반듯한 모양이 아닌데 이건 자연스러운 빈티지 느낌을 살리려고 의도적으로 그리하신 듯 보입니다.
p67에 보면 레이어가 많아질 때 각기 그룹을 만들어 정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tip 박스 안). 이 책에서 단계별로 자세히 설명된 건 레이어 단위로 그렇게 한 게 많습니다. 바로 뒤 페이지에도 나오지만, 이렇게 레이어를 그룹별로 정리해 두면 같은 레이어가 반복될 때 한 번에 복사하여 여럿을 붙여 넣을 수 있습니다. 통일성(필요하다면)을 기할 수도 있고 시간과 노력을 절감하겠죠.
p52를 보면 아마 빈(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즐긴 메뉴인 듯 마치 르누아르와 고흐가 반반씩 섞인 듯한 풍으로 단아한 테이블을 배경으로 삼은 그림이 나옵니다. 커피가 컵이 아니라 글래스에 담겼나? 싶게(책에는 컵이라고 나옵니다만)내용물이 다 비치는 듯 표현됩니다. 에스프레소는 특히나 투명컵으로 음미하는 게 제격일까요? 모르겠습니다. p58에서 12번째 그림, 커피 크림을 어떻게 그려 넣느냐가 중요해 보입니다. 크림 자체도 커피의 층이지만 크림 안에 다시 음영을 그려서 그 안의 층을 표현하는 게 정말 멋집니다. 그러고 보니 층(그림 표현의 단계) 안의 층(물리적 레이어)이네요.
p152에는 이탈리아 포지타노,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숙소 그림이 나옵니다. 여행 장소를 배경으로 일일이 사진을 찍어 두는 것도 추억을 환기하는 멋진 매개이지만 참 이렇게 정감어린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도 멋지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먼저 바다(해변)을 두 레이어로 나누어 그리고, 이어 바다를 표현합니다. 마치 앞에서 커피를 그리고 그 위에 크림층을 덧대어 그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레이어 순서상으로는 파도가 먼저지만 그리는 순서는 바다가 먼저라는 겁니다. "블러시 불투명도(p154)"를 어떻게 활용하냐가 포인트입니다. p174에서도 에펠탑 그림에서 거리불빛은 두번째 레이어이나 그리는 순서는 일곱번째입니다.

p183에서 여행사진, 이미 완전히 형태와 색이 갖춰진 사진을 "'균등'을 체크하고 양 끝점을 잡고 확대하여" 사진을 캔버스에 맞춘 후(이런 건 아이패드뿐 아니라 갤럭시탭에서도 비슷합니다), 세번째 단계에서 건물 전체를 검정으로 칠합니다. 이때부터 "그리기"가 시작되는 거죠. 다섯째 단계부터 석양 빛깔이 표현되며 그림 역시 사진을 닮아갑니다(그러나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갖춰 가는...). 노점상 지붕들이 그려지면 완성되는데 노점상 지붕이 마치 궁전의 벽면을 장식하는 듯 멋집니다.
프로 여행러는 무엇보다 준비의 달인이라야 합니다. p10부터 기본 개념을 이해시키고 어떤 작동법이 그림 그리는 데 핵심 기법으로 쓰이는지 잘 설명됩니다. 레이어 레이어 하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은 pp. 27~29를 잘 읽어 보면 됩니다(브러시도 그 다음에 나옵니다).
이 책에서 "여행"이라 함은, 정말로 퇴근 후에 배나 비행기를 타라는 게 아니라 일상을 여행의 느낌으로, 여행을 일상의 느낌으로 표현하는 그림 연습(의 세계로 여행을 감)을 뜻합니다(p51). 지치고 피곤해도 이처럼 멋진 손재주를 개발해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태블릿 안에 나만의 작품으로 영원히 남겨 놓으면 힐링이 따로 필요 없을 듯합니다. 참 멋지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